풍성한 설 극장가 상차림, 뭘 봐야 풍족할까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1.25 14:00
  • 호수 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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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를 앞두고 극장가 차림표를 보다가 문득 든 생각. 극장가 명절 특수는 유효한가. 극장가 비수기와 성수기의 경계가 옅어지면서, 명절 대목도 사라졌다고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 그러나 올해는 연휴가 짧다. 설날이 토요일(1월25일)인 탓에 대체 공휴일까지 더해도 4일밖에 되지 않는다. 연휴가 짧을수록 관객들이 여행 대신 극장을 찾는다는 지표가 있다. 올해도 그럴까. 설 연휴 개봉 영화들을 우선 살펴봤다.

설 연휴를 공략할 배급사 대표 선수들이 일찍이 정해져 있었다. 1월22일 권상우의 《히트맨》(롯데엔터테인먼트), 이병헌의 《남산의 부장들》(쇼박스), 이성민의 《미스터주: 사라진 VIP》(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리틀빅픽쳐스)가 동시 출격한다. 지난해 내놓은 세 편의 영화(《악인전》 《변신》 《블랙머니》) 모두를 흑자 경영한 신생 투자·배급사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도 설날 극장가에 첫 출사표를 던졌다. 안재홍 주연의 《해치지 않아》가 한 주 앞선 1월15일 먼저 개봉해 관객을 만나고 있다.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건, 연휴에 빠지지 않고 등판했던 CJ엔터테인먼트의 작품이 없다는 것. NEW 역시 연휴엔 쉬어 간다.

영화 《히트맨》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히트맨》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 배급 전략 다변화

올 설 극장가의 특징은 한국영화 대작 편수의 축소다. 순제작비 170억원을 들인 《남산의 부장들》을 빼면 중급 규모다. 대작 영화들이 짧은 연휴 기간에 한꺼번에 개봉해 제 살 깎아먹기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던 2018년 추석 극장가와 특히 비교된다. 당시 100억원 이상의 제작비를 들인 《안시성》 《물괴》 《협상》 《명당》 등이 개봉했지만, 겨우 제작비를 회수한 《안시성》을 제외하고 모두 흥행에 실패하며 시장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친 바 있다. 올해 관객의 선택을 받은 ‘천만 영화’ 5편 중 4편(4월 《어벤져스: 엔드게임》, 5월《기생충》과 《알라딘》, 11월 《겨울왕국2》)이 비수기에 개봉했다는 점 역시 배급 전략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반영하듯 CJ엔터테인먼트는 하정우-김남길의 만남으로 주목받는 《클로젯》을 2월로 편성했고,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역시 기대작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개봉일을 2월12일로 잡았다.

제작비로만 놓고 보면 흥행에 대한 부담은 《남산의 부장들》이 가장 크다. 마케팅 비용까지 더하면 총제작비가 200억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1979년 당시 제2의 권력이라고 불리던 중앙정보부장(이병헌)이 대통령 암살 사건을 벌이기 전 40일간의 이야기를 그린다. 1970년대 시대상을 구현한 대형 세트장과 미국, 프랑스 등에서 진행한 해외 로케이션에 상당액이 쓰였다는 후문이다. 《남산의 부장들》의 가장 큰 기대 요소는 배우들의 연기다. 이병헌 외에도 곽도원, 이성민, 이희준, 김소진 등 연기력에 있어 누구 하나 처지는 배우가 없다. 팽팽하다. 변수라면 우민호 감독? 《내부자들》로 연출력 호평을 받았지만, 《마약왕》으로 그 호평에 의구심을 받았던 감독이기도 하다. 다행이라면, 《내부자들》을 함께 한 이병헌과 다시 호흡을 맞췄다는 점. 《마약왕》의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설까. 가족 단위 관객들에게 《남산의 부장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도 궁금하다. 가족들이 많이 모이는 명절엔 ‘정치 이야기’가 밥상에 오르기 쉬운데, 《남산의 부장들》의 취하고 있는 소재가 ‘극장 민심’에 어떻게 반영될지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 제2의 《극한직업》을 노린다

코미디 영화 강세는 이어진다. 《히트맨》과 《미스터주: 사라진 VIP》의 소원은 ‘제2의 《극한직업》’일 것이다. 지난해 설 연휴 개봉한 《극한직업》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무려 1600만 관객을 빨아들인 바 있다. 《극한직업》 이전에도 설 연휴엔 코미디 영화 수요가 높았다. 이는 지난 15년간의 설 흥행 추이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액션+코미디’(《원스 어폰 어 타임》 《공조》), ‘사극+코디미’(《조선명탐정》), ‘드라마+코미디’(《댄싱퀸》 《7번방의 선물》 《검사외전》) 등이 설날 극장가를 장악했었다. 《히트맨》과 《미스터주: 사라진 VIP》가 그 흐름을 이어갈까.

《히트맨》은 웹툰 작가가 되고 싶어 국정원을 탈출한 암살 요원 준(권상우)의 이야기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했던가. 술이 문제인가. 그리지 말아야 할 1급 기밀을 술 김에 흘린 준이 국정원과 테러리스트의 더블 타깃이 되어 벌이는 고군분투기다. ‘짠내’ 나는 웹툰 작가가 된 전직 암살 요원이라니. 만화방 주인이었다가 뒤늦게 탐정사무소를 개업한 《탐정》 시리즈의 강대만(권상우)의 ‘역버전’ 느낌이 살짝 인다. 《탐정》 시리즈가 그랬듯 《히트맨》 역시 권상우표 코믹 생활 연기가 관전 포인트다.

가족이 함께하기에 가장 ‘안전한’ 영화는 재미뿐 아니라 감동도 추구하는 영화일 것이다 《미스터주: 사라진 VIP》가 여기에 부합한다. 국가정보국 에이스 요원 태주(이성민)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온갖 동물의 말이 들리면서 펼쳐지는 사건을 그린다. 태주가 독일 태생의 군견인 알리와 콤비를 이뤄 사건을 파헤치는 게 주요 내용이다. 독특한 설정은 아니다. 1월8일 개봉한 판타지 어드벤처 《닥터 두리틀》 역시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두리틀(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엠마 톰슨, 톰 홀랜드, 옥타비아 스펜서 등 최정상급 스타가 동물 목소리를 연기한 것처럼 《미스터주: 사라진 VIP》에도 신하균, 유인나, 김수미, 이선균, 이정은 등 개성 강한 목소리 소유자들이 힘을 보탰다. 두 영화를 통해 동서양의 동물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미스터주: 사라진 VIP》처럼 동물을 내세운 영화가 또 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동물들이다. 동물 탈을 쓰고 동물인 척 연기하는 인간들이 대거 출연하는 《해치지 않아》가 그 주인공. 영화는 망하기 일보 직전의 동물원 동산파크에 야심 차게 원장으로 부임하게 된 변호사 태수(안재홍)와 팔려간 동물 대신 동물로 근무하게 된 직원들의 기상천외한 미션을 그린다. 비상한 멜로물 《달콤, 살벌한 연인》과 기발한 스럴러물 《이층의 악당》을 선보였던 손재곤 감독의 작품이니만큼 통통 튀는 느낌이 가득하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로 유명한 Hun 작가가 2011년 연재한 작품이 원작이다.

ⓒ (주)쇼박스·리틀빅픽처스·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주)쇼박스·리틀빅픽처스·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할리우드 영화·예술 영화를 찾으신다면

할리우드 영화 마니아라면 마약 수사반의 베테랑 형사 마이크(윌 스미스)와 마커스(마틴 로렌스) 콤비에 주목하자. 전 세계에 액션 버디 무비의 재미를 알린 《나쁜 녀석들》이 17년 만에 《나쁜 녀석들: 포에버》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원년 멤버들이 그대로 출연한 만큼 1, 2편을 봤던 관객이라면 적잖은 향수에 젖게 될 것이다. 마이크와 마커스의 현란한 입담은 세월 앞에서도 끄떡없이 살아 있다. 문제는 이전 같지 않은 체력. 그 괴리에서 오는 유머를 동력 삼아 영화는 달린다. 1, 2편 감독을 맡았던 마이클 베이가 카메오로 출연한다. 시리즈에 대한 마이클 베이의 애정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상업 영화의 홍수 속에서 예술 영화를 찾는 분이라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눈길이 갈 것이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기생충》과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두고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와 그녀의 결혼식 초상화 의뢰를 받은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의 사랑을 그린다. 토드 헤인스 감독의 《캐롤》, 루카 과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를 잇는 명품 퀴어 로맨스로 벌써부터 입소문이 자자하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신의 은총으로》는 지난해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이다. 프랑스 리옹에서 실제 일어난 한 신부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로, 소재가 다소 무겁긴 하나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로 2016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스포트라이트》가 있다. 《스포트라이트》가 거대한 종교 시스템에 맞서 싸운 기자들의 이야기였다면, 《신의 은총으로》는 사건 당사자들의 시선을 스크린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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