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팔(OPAL) 세대, 은퇴는 없다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0.01.29 10:00
  • 호수 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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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0대 소비 키워드 중 ‘오팔 세대’ 지목…Z세대 누르고 트렌드 주도층으로 급부상

시니어 모델로 최근 주가를 높이고 있는 김칠두씨와 유튜브 채널 ‘차산선생 법률상식’을 운영하는 박일환 전 대법관. 언뜻 보면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없다. 인생 궤적도 전혀 다르다. 김칠두씨는 27년간 순댓국집을 운영하다 뒤늦게 시니어 모델로 데뷔했다. 박 전 대법관은 사법연수원 5기로, 2012년까지 대법관을 지낸 법조계 원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60대의 뒤늦은 나이에 도전해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김칠두씨는 한때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젊은 시절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순댓국집을 차렸는데,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하지만 프랜차이즈화 과정에서 실패하면서 가게마저 접어야 했다. 딸의 도움으로 도전한 것이 모델 일이다. 그는 2018년 F/W 헤라서울패션위크의 KIMMY J 쇼에서 국내 최초로 시니어 모델에 데뷔했다. 현재는 남성복과 아웃도어 브랜드뿐 아니라 식음료 모델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박일환 전 대법관은 1973년 제15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8년 서울민사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30년 넘게 법관 생활을 했다. 2012년 대법관으로 퇴임했고, 현재는 법무법인 바른의 고문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부터 유튜브 채널인 ‘차산선생 법률상식’을 운영 중이다. 법관 경력을 바탕으로 실생활에 유용한 법률 상식이나 분쟁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곳이다. 최근 구독자 4만2000명을 돌파했다. 그는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딸과 손녀의 응원에 용기를 냈다. 원고 작성부터 촬영, 편집까지 모두 직접 한다”며 “예상과 다르게 사람들 반응이 나올 때 신기하고 의욕을 느낀다”고 말했다.

60대 인생 2막 “꿈이 아니다”

김씨나 박 전 대법관처럼 주변을 둘러보면, 늦은 나이에 시작해 ‘인생 2막’을 성공으로 이끈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다. 1960년을 전후로 미국의 원조물자를 배급받으며 유소년기를 보냈지만, 청년기 들어 한강의 기적을 체험했다. 1970년대 후반 불어닥친 ‘중동 붐’과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이 이어지면서 큰 어려움 없이 취업에도 성공했다. 그렇게 고도 성장기에 취업을 하고 결혼해 가정을 꾸린 만큼 자산도 모든 세대 중에서 가장 많다.

1990년대 중반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재계에는 ‘구조조정 피바람’이 불었지만, 이들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외환위기는 이들이 한국 사회의 중심무대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선배들이 대거 물러나면서 기회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베이비부머들은 그동안 밀레니얼 세대(1980~95년 출생자)나 Z세대(1995년 출생자)에 가려져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시니어 혹은 노년층 취급을 받으며 존재감 없이 살아왔다. 지난해 김난도 서울대 교수가 ‘올해 10대 소비 키워드’ 중 하나로 ‘오팔(OPAL) 세대’를 지목하면서 베이비붐 세대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OPAL’은 활기찬 인생을 살아가는 신노년층(Old People with Active Lives)의 약자로, 베이비부머를 대표하는 58년 개띠를 의미한다.

이들 세대는 자식들에게 의존하던 기존 노년층과 차이가 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그는 “오팔 세대는 은퇴 후에도 새로운 일자리에 도전하고, 여가생활도 활발하게 즐긴다”며 “인터넷이나 모바일에도 능하기 때문에 젊은 층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취향과 브랜드를 좇으며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록밴드 ‘퀸’의 리드보컬인 프레디 머큐리 일대기를 다루며 흥행 열풍을 이끌었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대표적이다. 배급사인 이십세기폭스 코리아가 당시 예상한 관객 수는 많아야 150만 명 수준이었다. 그만큼 개봉 초기 관심도는 높지 않았다. 퀸의 향수가 있는 오팔 세대가 서서히 영화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 영화는 개봉 2주 만에 흥행 1위에 올랐다. 지난해 초에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에 퀸과 프레디 머큐리 ‘신드롬’을 만들었다. ‘퀸알못’(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퀸망진창’(퀸과 엉망진창의 합성어) 같은 신조어가 나올 정도였다.

TV조선의 《미스트롯》은 한국에 ‘트로트 열풍’을 일으켰다. 이전까지 트로트는 중장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미스트롯》의 흥행이 이어지면서 트로트의 저변이 젊은 세대로까지 확대됐다. 종영 당시 시청률은 18.1%. 무명의 트로트 가수였던 송가인은 일약 스타가 됐다. TV조선은 최근 시즌2 성격인 《미스터트롯》을 선보였는데, 첫 방송 시청률이 12.7%를 기록할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다. 정덕현 문화 평론가는 “《미스트롯》이 8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도달했던 시청률을 《미스터트롯》은 첫 회에 간단히 넘겨버렸다”며 “기성세대가 트로트 열풍을 통해 그간 소외돼 있던 문화 소비의 중심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오팔 세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소비와 트렌드를 이끄는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현대백화점이 2019년 10월 개최한 시니어 모델 선발대회 ⓒ 현대백화점 제공
오팔 세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소비와 트렌드를 이끄는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현대백화점이 2019년 10월 개최한 시니어 모델 선발대회 ⓒ 현대백화점 제공

오팔 세대 등에 업고 ‘퀸’과 ‘트로트’ 열풍

과거 노년층과는 달리 오팔 세대는 자신을 꾸미는 데도 적극적이다. 명품이나 화장품 등의 구매나 취미활동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덕분에 오팔 세대는 현재 소비 시장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백발을 뜻하는 ‘그레이(grey)’와 ‘르네상스(renaissance)’를 합친 용어인 ‘그레이네상스(Greynaissance)’ 같은 신조어도 생겨났다.

실제로 롯데와 신세계, 현대백화점 등 백화점 3사에 따르면 최근 50대 이상의 소비가 크게 증가했다. 단순히 자산 대비 소비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컨템포러리 브랜드(최신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의류, 잡화 등의 상품군) 구매 비중이 높아졌다. 신세계백화점의 컨템포러리 브랜드 매출 비중은 50대가 42.9%로, 40대(32.7%)와 30대(20.7%)를 크게 압도했다. 특히 50대의 매출 비중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2015년 36%에서 2019년 42.9%로 4년 만에 7%나 증가했다. 롯데백화점의 경우 타임 등 여성 캐릭터 의류와 빈폴레이디스 등 트래디셔널 여성의류 구매의 50% 이상을 50대가 차지하기도 했다.

현대백화점의 경우 이 수치가 더 가파르다. 50대 이상의 컨템포러리 브랜드 매출 신장률은 지난해 15.1%를 기록했다. 현대백화점 공식 온라인몰인 더현대닷컴의 지난해 연령대별 매출 신장률을 분석한 결과, 60대 이상이 61.3%로 전체 1위를 차지했다. 오팔 세대에서 ‘젊은 소비’ 트렌드가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김준영 현대백화점 상무는 “기존의 시니어층은 은퇴 이후 절약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고 유행에도 민감한 오팔 세대가 최근 늘어나면서 컨템포러리 브랜드의 매출 비중도 매년 증가 추세”라면서 “이런 트렌드에 맞춰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10월 60대 이상 모델의 공개 오디션인 ‘시니어 패셔니스타 콘테스트’를 개최했다. 60대 이상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이 변하는 만큼, 주요 소비층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잡겠다는 취지였다. 한 달여의 심사 과정을 거쳐 10명의 시니어 모델을 선발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오팔 세대는 ‘신중년’으로도 불린다. 2017년 8월 ‘新중년 인생 3모작 기반구축 계획’을 정부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하면서 나온 용어다. 우려스러운 사실은 국내 베이비부머들의 은퇴 시기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최근 발표한 ‘베이비부머 은퇴와 재취업 현황분석’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베이비부머 수는 723만 명이지만, 고용률은 66.9%(483만5000명)에 그쳤다. 2010년(75.6%)을 기점으로 고용률이 매년 감소 추세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의 막내 격인 1963년생이 2018년 만 55세를 넘겼다. 만 60세가 넘으면 4명 중 1명은 은퇴한다는 고령화연구패널조사 결과를 감안할 때 2021년이 되면 12.7%(91만8000명)가 은퇴하게 된다.

문제는 이들이 여전히 일을 하고 싶다는 점이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고령층(55~79세) 3명 중 2명(64.9%)이 여전히 일하기를 원한다. 계속 일하기를 희망하는 연령은 평균 73세까지다. 서울시가 최근 시민 80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도 비슷했다. 응답자들은 68.3세까지 일하기를 희망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베이비부머들의 은퇴가 가속화할 경우 오팔 세대의 영향력 역시 과거보다 줄어들 수 있다. 빠르게 재취업을 한다고 해도 생계형 일자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021년 ‘베이비부머 본격 은퇴’ 주목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고령자 고용안전법’을 통해 기업이 65세까지 고용을 의무화하도록 했다. 일본 정부는 현재 이 기준을 70세까지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하철규 수석연구원은 “종업원이 31명 이상인 일본 기업의 경우 계속고용제도와 정년 연장, 정년 폐지 중 하나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며 “대부분의 기업들이 계속고용제를 도입하고 있다. 정년퇴직 후 재고용하는 형식으로 임금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 역시 55~64세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69.1%에 달한다. 일본(75.3%) 다음으로 높다. 우리 정부도 현재 일본의 ‘계속고용제도’를 벤치마킹해 2022년부터 도입하는 안을 검토 중이다. 60세 정년 이후 일정 연령까지 고용 연장 의무를 부과하되, 기업이 재고용과 정년 연장, 정년 폐지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하지만 이 같은 조치를 취하더라도 100세 시대를 감안할 때 여전히 남은 시간이 많은 만큼 인생 2막에 대한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재계 특명 “오팔 세대를 잡아라”

오팔 세대가 소비 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이끄는 계층으로 부각되면서 기업들 역시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자사 상품 구성에서부터 콘텐츠, 심지어 광고와 마케팅 전략까지도 대폭 수정했다.

실제로 옥션이 2014년부터 2018년 상반기까지 전 품목의 연령별 판매량을 분석한 결과, 50대와 60대의 증가율이 각각 130%와 17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두 연령대의 고객 비중은 2014년 17%에서 2018년 27%로 크게 증가했다. 품목별로 보면 여행과 항공권 구매 증가율이 1040%로 가장 높았다. 뒤를 이어 고급 브랜드 의류 구매(683%), 고가 수입명품 구매(184%) 등의 순이었다.

이들은 산업의 지형도마저 바꿔놓았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관계자는 “오팔 세대가 바꿔놓은 대표적인 산업 트렌드가 당구장이다. 가성비 좋은 시간 활용법을 찾다가 죽어가던 당구 시장을 일으켰다”며 “당구장마다 고교별, 대학별 동문 친선대회가 열리면서 당구장은 현재 오팔 세대뿐 아니라 밀레니얼이나 Z세대의 새로운 교류 창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오팔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방향으로 기업들이 전략을 바꾼 것도 이 때문이다. 캐주얼 브랜드 빈폴은 지난해 론칭 3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리뉴얼을 진행했다. 기존 영문을 버리고 한글 로고로 간판을 바꿔 단 것이 우선 눈에 띈다. 매장 분위기 역시 60~70년대 감성으로 교체했다. 매장 전면에 옛날 가정집 부엌의 찬장에 쓰이는 유리를 써 오팔 세대의 향수를 자극했다.

패션그룹 세정 역시 오팔 세대의 ‘추억 소환’에 적극적이다. 최근 웰메이드 론칭 45주년을 맞아 자사의 대표 브랜드인 인디안의 시그니처 로고를 만들었는데, 초기 광고 콘셉트를 대거 차용했다. 반면 상품 구성은 차별화했다. 촌스러운 ‘아재’ 스타일에서 벗어나 젊고 세련된 분위기의 ‘블랙라벨 라인’을 선보였다. 주요 고객인 중장년층의 향수와 Z세대의 레트로를 불러내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대한제분의 밀가루 브랜드인 곰표는 심지어 남성의류 쇼핑몰 4XR과 협업해 ‘곰표 패딩’을 출시했다. 밀가루를 상징하는 하얀색 후드티에 곰표 밀가루를 새겼는데, 예상외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평가다. 이 밖에도 리복은 오리지널 클래식 로고로 돌아섰고, 쿠팡은 노년층 맞춤 테마관인 ‘실버스토어’를 2018년부터 운영 중이다.

브랜드의 얼굴인 광고 모델도 많이 바뀌었다. 인기 스타 대신 신뢰도가 있는 시니어 모델을 영업해 로열티를 끌어올리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아웃도어 브랜드 코오롱스포츠는 국내 대표 배우인 김혜자씨를, 스트리트 캐주얼 브랜드 MLB가 1970년대 배우 문숙씨를 모델로 영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콘텐츠 시장도 변하고 있다. KT는 중장년층을 위해 자사 IPTV에 맞춤형 외화 더빙 서비스인 ‘룰루낭만’ 서비스를 추가했다. 라이나전성기재단은 최근 시니어 전문 포털을 오픈하면서 ‘퇴직한 다음날’이라는 이름의 유튜브 채널도 개설해 좋은 받응을 얻었다. 한화생명은 의료 전문 콘텐츠 채널 ‘건강톡’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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