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맥을 잇는 노력,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이유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1.2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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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46화 - 마지막 왕가, 그 후

1919년 1월 21일은 고종 서거일이다. 한일병탄으로 나라는 진즉에 망했지만 그의 죽음은 백성들 마음에서 조선 왕조가 완전히 사라지는 계기가 됐다. 마지막 왕 순종이 살아있긴 했지만 존재감 없는 일제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오죽했으면 헤이그 밀사 이상설이 “임금이 나라를 보호하고 인민을 구조하는 임무를 게을리 하면 처단되어야 한다”란 말까지 했을까. 게다가 ‘일한합병조약’이란 건 왕족과 친일 대신들의 신분 보장, 재정 지원이 주를 이뤘다. 나라를 통째로 팔아넘기고 자신들은 일본의 귀족으로 호의호식했던 것이다. 

 

루비 찾기, 환생, 집단 살인극까지…몰락한 아시아 왕가 후예들의 파란만장한 삶

아시아 다른 왕가들은 열강의 침략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시대순으로 살펴보면, 먼저 미얀마의 꼼바웅 왕조는 1824년과 1852년 두 차례 영국의 침략을 받았다. 격렬한 저항 끝에 영토 일부를 빼앗겼지만 왕권은 유지했다. 얼마 후 왕세자에 오른 끄넝(1820~1866)은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젊은 학자들을 해외에 보내 근대 문물 습득에 힘썼고 무기·염료·주물 공장을 40여 개나 지었으며 당시로는 첨단 기술인 수중폭파 무기 개발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극심한 왕권 다툼이 벌어져 끄넝 왕세자가 암살되면서 1885년 영국군에게 손쉽게 왕궁을 내주고 말았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마지막 왕인 띠버의 후손들이 “영국군이 약탈한 왕가 보석을 돌려 달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왕궁 점령 당시 영국군이 오리알 크기의 ‘국보 루비’를 훔쳐갔다는 것이다. 실제로 띠버 왕은 유배지 인도에서 영국 왕에게 여러 차례 반환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2017년 11월 방영된 영국 BBC 다큐멘터리에서는 문제의 루비에 대해 “영국군이 가져간 건 맞지만 보석의 행방은 알 수 없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내렸다. 이 프로그램에서 띠버 왕의 증손자 우 소 윈은 영국 왕실이 보물을 감추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용서할 순 있지만 결코 잊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끄넝 왕세자 동상과 그가 수도 만들레이 근교에 세운 주물 공장 터. 오른쪽은 띠버 왕과 BBC에 출연한 증손자 우 소 윈
끄넝 왕세자 동상과 그가 수도 만들레이 근교에 세운 주물 공장 터. 오른쪽은 띠버 왕과 BBC에 출연한 증손자 우 소 윈

그의 주장은 조선 왕실의 보물들을 반환하지 않는 일본의 행태를 떠올리게 한다. 2013년 도쿄 국립박물관은 고종의 것으로 추정되는 투구·갑옷·왕실 도장과 명성황후가 쓰던 소반 등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 소반은 일본인 자객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장소에서 들고 나온 것이었다. 박물관 측은 “서구열강으로 유출될 우려 때문에 일본에서 수집, 보관하게 된 것”이라며 반환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약탈 문화재에까지 “서구 침략에서 아시아를 구제하기 위해서”라는 일제의 전쟁 명분을 되뇌고 있는 꼴이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보물뿐만이 아니다. 오스만 왕족들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13세기 말 지금의 터키 땅에 등장한 오스만제국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 3개 대륙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600년 넘게 지속된 제국의 종말을 맞게 되었다. 마지막 황제 메흐메트 6세(1918~1922 재위)는 ‘평민 국부’ 케말 파샤에 의해 프랑스 파리로 쫓겨났다. 황족들도 “추방 후 남자는 50년, 여자는 28년 동안 귀국할 수 없다”는 법령에 따라 고국 땅을 밟을 수 없게 되었다.

뿔뿔이 흩어진 오스만제국의 후예들은 비참한 삶을 살았다.《술탄의 사생활》이란 책에 따르면 추방 당시 13살이던 황자 오르한(1909~1994)은 기차역 짐꾼과 전차 운전수 등 막일을 하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에 입대했다. 종전 후에는 생계를 위해 미국인 묘지 관리인으로 일하는 등 모진 삶을 겪게 되었다. 그는 1990년 ‘라이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오스만 후예로 사는 건 시간과 숨을 쉬는 것”이란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현재 생존한 77명의 후손 대다수는 오랜 외국 생활로 모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귀국을 망설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2013년 영국 런던의 터키 대사관에서 처음 한 자리에 모였고, 지금은 SNS를 통해 일상을 공유하고 소통하고 있다.

황궁을 떠나 망명길에 오르는 메흐메트 6세. 오른쪽은 황자 오르한과 2013년 런던에 모인 오스만 황실 후손들
황궁을 떠나 망명길에 오르는 메흐메트 6세. 오른쪽은 황자 오르한과 2013년 런던에 모인 오스만 황실 후손들

한때 오스만제국을 능가하는 대제국을 일군 몽골 왕국도 같은 시기에 종말을 맞았다. 마지막 왕 복드칸(1869~1924)은 티벳 불교의 승려였기에 따로 섭정을 두어 통치했다. 우리 독립운동가 이태준 선생이 그의 주치의를 지낸 일은 익히 알려져 있다. 1920년 러시아 백군의 운게른 남작이 침략해 왕권을 중단시키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기도 했다. 이듬해 그가 죽은 후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잠시 왕정이 복구되었다가 1924년 복드칸이 열반에 들면서 몽골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티벳 불교가 워낙 민간에 뿌리 깊은 탓에 “복드칸이 환생했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가 1932년 티베트 라싸에서 그의 환생이라는 한 소년이 발견되었다. 3단계의 시험을 거쳐 환생을 인정받은 그의 존재는 소련 당국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그 후 인도의 티벳어 방송국에서 일하며 평범한 삶을 살던 그는 소련이 무너진 뒤 즉위식을 갖고 몽골 불교의 수장에 올랐다가 2012년 열반에 들었다.

몽골에서 러시아 백인 운게른이 황제 노릇을 한 게 1년이 채 안되었지만, 아시아 남쪽에서는 ‘백인 왕조’가 100년 넘게 지속되는 놀라운 일도 벌어졌다. 영국군 출신인 제임스 브룩(1842~1868 재위)은 1841년 말레이 제도 보루네오섬에 사라왁 왕국을 세웠다. 브루나이의 술탄이 해적을 물리친 공로로 그에게 사라왁 지역의 종신 지배권을 양도한 것이다. 1880년대 말레이 반도에 진출한 영국은 이곳을 보호령으로 삼았고, 태평양전쟁 때 일제가 침공하자 3대 찰스 브룩 왕과 왕족들은 호주로 망명하게 되었다.

왼쪽부터 복드칸, 운게른 남작, 제임스 브룩
왼쪽부터 복드칸, 운게른 남작, 제임스 브룩

종전과 함께 일제 식민지배가 끝나면서 찰스 왕은 복위했지만 곧 왕권을 영국에 이양하게 되었고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편입되었다. 그 뒤 왕조의 후손들은 옛 사라왁 왕국의 통치권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물론 말레이시아가 독립하기 이전에 영국에 이양한 이상 별 의미 없는 주장이다. 이들은 최근 들어 초대 국왕인 제임스 브룩이 남긴 “선행을 실천하기 전까지는 절대 귀향할 꿈도 꾸지 말아라”는 말을 거울삼아 이 지역의 발전을 위한 자선 활동에 힘쓰고 있다.

 

백 년 넘게 지속된 아시아 유일의 ‘백인 왕조’ 사라왁

아시아 왕가들 가운데 프랑스 식민지배를 겪은 베트남과 라오스 왕조는 2차 세계대전 후 몰아닥친 공산 혁명으로 무너졌고, 캄보디아는 2004년 ‘걸출한 군주’ 시아누크 왕이 양위한 후 왕조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건 히말라야의 ‘은둔의 왕국’ 네팔 왕조다. 2001년 6월 라마 왕조의 비렌드라 왕과 일가족 9명이 무참히 살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왕세자가 자신의 결혼을 반대한 데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집단 살인극으로 정국은 혼란에 빠졌고, 결국 2007년 네팔 의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흥미로운 건 이미 몰락한 아시아 왕실들이 아직도 왕위 계승자를 내고 있는 사실이다. 네팔·터키·사라왁·베트남·류큐 왕국 등은 물론이고 환생을 통해 계승되는 몽골도 현재 후대로 인정된 아이가 성인이 되면 불교 수장에 오른다고 한다. 하기야 조선 왕가도 지금껏 왕위가 이어지고 있긴 하다. 2006년에는 황실 복원 모임에서 여성 후손을 ‘대한제국 여황제’로 내세웠다가 종친 단체가 거세게 반발하는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2019년 5월5일 서울 덕수궁 정관헌에서 대한제국 외국공사 접견례 재현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날 접견례는 고종황제가 미국.프랑스.영국.러시아 공사를 만나는 순으로 진행됐다. ⓒ연합뉴스
2019년 5월5일 서울 덕수궁 정관헌에서 대한제국 외국공사 접견례 재현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날 접견례는 고종황제가 미국.프랑스.영국.러시아 공사를 만나는 순으로 진행됐다. ⓒ연합뉴스

이런 왕위 계승 활동은 왕실의 전통을 문화적 가치로 이어가려는 뜻으로 읽힌다. 근래에 우리도 고종의 길, 순종 어가 행렬을 복원한데 이어 ‘고종의 식탁’ 전시회도 여는 등 조선 왕실의 맥을 잇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담긴 ‘치욕의 역사’가 소홀히 다뤄지는 게 아닌가 싶어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뼈아픈 망국의 역사를 반성하고 후대의 교훈으로 삼을지언정 무턱대고 문화유산으로 포장할 일이 아니란 얘기다. 아시아 어느 왕가도 조선처럼 나라를 외적에 갖다 바치고 배불리 먹고 산 적이 없었다. 역사적 실체에 다가가려는 자세가 더욱 요구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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