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슐랭 가이드, 너 믿어도 되니?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12 17:00
  • 호수 1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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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도락의 성서(聖書)인가 상술(商術)인가
미슐랭 시작지 프랑스에서 ‘별 셋’ 반납도

1월27일 ‘미슐랭(미쉐린) 가이드’ 2020년판이 발간됐다. 미슐랭 가이드는 그 시작지인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 대도시의 내로라하는 식당들에 평점을 매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해마다 새 별점이 공개되면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단연 독보적인 ‘식도락의 성서(聖書)’로 평가돼 왔다. 

미슐랭 가이드의 역사는 1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슐랭은 프랑스 중부 도시 클레르 몽페랑에서 출발한 타이어 회사였다. 때는 1900년, 프랑스를 달리는 자동차가 3000대도 채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자동차 산업이 언젠가는 대세로 자리 잡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 타이어 회사 운영자 앙드레 미슐랭과 에드워드 미슐랭, 두 형제가 프랑스 자동차 운전자들을 위한 안내서를 발간했다. 자동차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기였던 만큼 차량 정비소와 숙소와 먹거리에 관한 정보를 싣는다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1900년 첫 미슐랭 가이드로 3만5000부를 인쇄했다. 두 형제는 발간사에서 “새로운 세기와 함께 태어난 미슐랭 가이드는 이 세기보다 더 오래갈 것”이라고 당차게 예견했다. 그들의 전망대로 한 세기를 넘긴 것은 물론 오늘날 미식업계를 좌지우지하는 절대권력으로 자리 잡게 됐다.

전 세계 식당들에 평점을 매기는 것으로 유명한 120년 역사의 ‘미슐랭 가이드’ ⓒ google
전 세계 식당들에 평점을 매기는 것으로 유명한 120년 역사의 ‘미슐랭 가이드’ ⓒ google

“미슐랭은 낡아빠진 가이드”

미슐랭 가이드는 1904년 벨기에를 시작으로 프랑스 국경 너머까지 보폭을 넓혔다. 1910년엔 독일·스페인·포르투갈까지 섭렵했다. 단순한 차량 정비소와 인근 호텔 식당 안내서로 출발한 미슐랭 가이드가 지금처럼 화제의 중심이 된 것은 식당에 대한 평가를 별 등급으로 매겨 싣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현재 논란의 중심이 된 별 등급을 매기기 시작한 것은 1933년부터였다. 시작은 단순했다. 최고 평점인 ‘별 셋’은 ‘여행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었다. 음식을 먹으러 그곳을 가볼 만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등급인 ‘별 둘’은 ‘우회할 가치가 있다’는 의미. 굳이 그곳까지 일부러 갈 필요는 없으나 행선지를 우회할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낮은 등급인 ‘별 하나’에 대한 정의는 간단히 ‘훌륭한 식탁’이라는 뜻이었다.

1920년까지 무료로 배포된, 세 등급의 단순한 평가서로 시작된 미슐랭은 한 세기를 넘기며 매년 3000만 부를 찍는 ‘베스트셀러’로 성장했다. 늘어난 판매량만큼 그 영향력은 막강해졌으며, 자연히 그들의 평가에 대한 각종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미슐랭 가이드에 대한 비판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2004년 두 권의 책 때문이었다. 발단은 2003년 유명 셰프 베르나르 루이조의 자살이었다.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셋을 받았던 식당 등급이 이듬해 하락하자 이를 비관해 목숨을 끊은 것이다. 식당에 대한 단순한 평가를 넘어 식당의 명운을 좌지우지할 뿐 아니라, 요리사의 생명까지 앗아가는 상황으로 번진 것이다.

비판은 물밀 듯이 쏟아졌다. 전직 미슐랭 검사관이었던 파스칼 레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펴낸 저서 《검사관, 식탁에 앉다》를 통해 미슐랭의 폐쇄적인 평가 시스템을 정면으로 지적했다. 음식 비평 전문기자인 올리비에 모르토 역시 ‘음식산업: 프랑스 미식업계의 검은 이면’이라는 글을 통해 식도락 업계의 돈과 권력을 둘러싼 파워게임과 미슐랭 가이드의 영향력이 외식산업과 관광업계에 미치는 파급력까지 다각도로 분석했다.

미슐랭 가이드에 대한 논란은 그 후로도 끊이지 않았다. 최근 들어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일은 프랑스 요리 역사의 상징으로 꼽히며, ‘요리계의 교황’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셰프 폴 보퀴스의 식당 등급이 내려앉은 것이었다. 폴 보퀴스는 2003년 베르나르 루이조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음식은 기계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미슐랭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맞선 바 있다.

1월27일 발간된 미슐랭 가이드 2020년판 역시 세상에 공개된 직후부터 반발이 빗발치고 있다. 프랑스 시사주간 ‘마리안’의 식도락 부문 편집장인 페리코 레가스는 “미슐랭은 불공정하고 낡아빠진 가이드”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특히 그는 미슐랭 가이드의 지역 차별을 꼬집었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음식문화를 지속적으로 소개해 온 페리코 편집장은 “미슐랭은 노르망디 지방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며 “노르망디 지역에서 미슐랭에 선정된 28개의 식당 중 단 두 곳만이 ‘두 개의 별’을 받았으며, 별 셋을 받은 식당은 전무하고 나머지 식당 모두 ‘별 하나’에 그쳤다”고 말했다.

이처럼 미술랭 가이드의 결과를 두고 각 지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여전히 미슐랭의 평가에 따라 관광객 유입은 물론 일자리 창출 등 지역경제가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파급력이 이토록 막대하기에, 해마다 불공정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 또한 미슐랭 가이드의 마땅한 운명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프랑스 ‘요리계의 교황’이라고 불리는 폴 보퀴스는 미슐랭 가이드에 “음식을 기계적으로 평가하지 말라”고 공개 비판했다. ⓒ AP연합
프랑스 ‘요리계의 교황’이라고 불리는 폴 보퀴스는 미슐랭 가이드에 “음식을 기계적으로 평가하지 말라”고 공개 비판했다. ⓒ AP연합

“더 이상 별에 목맬 이유 못 느껴”

지난해 미슐랭 가이드의 서울판 식당 선정에 대해 잡음이 일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흥행 보증수표'라는 미끼로 금품을 요구받았다는 레스토랑의 주장이 나오면서 식당 선정의 공정성이 더욱 도마에 올랐다. 논란 후 자신의 식당을 불명예스러운 미슐랭 별점 리스트에서 제외해 달라는 셰프들의 요구도 등장하며 상황이 악화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미슐랭 가이드에 반기를 드는 사례가 꾸준히 있어 왔다. 알자스 지역 유명 요리사로, 미슐랭 가이드에서 19점(20점 만점)을 기록한 앙투완 웨스트만은 2007년 ‘별 세 개’를 공개적으로 반납했으며, 또 다른 스타 셰프 올리비에 로엘링거는 “매일 쫓기듯 살아가는 삶에 지쳤다”는 이유와 함께 2008년 별 셋 등급의 식당을 폐업하기도 했다.

전 세계에 포진한 식당에서 총 18개의 미슐랭 별을 획득한 프랑스의 전설적인 요리사이자 사업가 알랭 뒤카스는 미슐랭 별점을 두고 “잃으면 아쉽지만 그저 다시 얻기 위해 노력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별 하나에 식당의 명운과 개인의 앞길이 달린 젊은 셰프들은 100여 년 전 자동차 운전 안내서에 실린 추천 맛집이 미식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흐름에 반기를 들고 있다. 해마다 미슐랭 가이드가 선정하는 2만여 개의 맛집, 그중 별 세 개를 얻는 100여 곳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더 이상 목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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