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이슈가 띄우는 ‘우먼파워’
  • 클레어 함 유럽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05 17:00
  • 호수 1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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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문제 관심 커진 유럽, 환경운동가 출신 여성 리더들 잇달아 대통령·총리 선출

그리스 의회가 1월22일 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을 승인하면서 최근 잇달아 탄생하고 있는 유럽연합(EU)의 여성 정치지도자들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리스 여야 정당의 압도적 지지로 선출된 에카테리니 사켈라로풀루 신임 대통령은 3월13일부터 5년의 임기를 수행할 예정이다. 뿌리 깊은 가부장 사회 국가로 평가되는 그리스에서 특정 정당 소속이 아닌 판사 출신 여성이 90%에 가까운 지지율로 선출된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그를 대통령으로 지명한 신민주당 소속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는 TV 연설에서 “그리스 사회가 미래로 문을 열 시간이 다가왔다”고 밝히며 통합과 전진을 위한 선택이었음을 강조했다. 현재 양극화된 그리스 정치지형에서 그녀의 존재가 여야 통합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28개 회원국을 보유하는 유럽연합은 그리스의 사켈라로풀루 대통령 이외에도 핀란드의 산나 마린 총리, 슬로바키아의 주자나 카푸토바 대통령, 크로아티아의 콜린다 키다로비치 대통령 등 여성 지도자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또한 지난해 선출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도 독일 국방부 장관 및 여가부 장관 출신으로 여성으로선 처음 EU 집행위원장직을 맡게 됐다. 유럽성평등연구소(EIGE) 통계에 의하면 EU 회원국 가운데 ‘국회와 행정부 고위직에 종사하는 여성 비율’은 2019년 기준 평균 31.5%에 달한다. 

2018년엔 30.6%로, 2003년 20.5%를 기록했던 수치가 30%대에 진입하는 데 대략 15년이 걸린 셈이다. 상위권 5위 내 국가는 스웨덴(46.7%), 핀란드(46.5%), 스페인(44.4%), 벨기에(43.5%), 노르웨이(40.8%)다.

(왼쪽부터)그리스의 사켈라로풀루 대통령, 핀란드의 산나 마린 총리, 슬로바키아의 주자나 카푸토바 대통령 ⓒ 연합뉴스
(왼쪽부터)그리스의 사켈라로풀루 대통령, 핀란드의 산나 마린 총리, 슬로바키아의 주자나 카푸토바 대통령 ⓒ 연합뉴스

기후위기가 주요 정치의제로 떠올라

유럽에서 여성 리더들이 각광받는 배경에는 ‘환경’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과 기대가 큰 몫을 차지한다. 사켈라로풀루 그리스 대통령, 마린 핀란드 총리, 카푸토바 슬로바키아 대통령은 모두 그간의 환경운동으로 많은 주목과 기대를 받고 있다.

환경법과 헌법 전문가인 신임 사켈라로풀루 대통령은 국립판사교육원(National School of Judges)에서 환경법을 강의했고, 그리스 환경법협회 회장직도 맡았다. 

2017년에는 공동집필한 《경제위기와 환경보호에 관한 대법원 판결 고찰》이라는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고, 환경에 관한 많은 연구와 다수의 기사를 써온 것으로 알려진다. 중도우파 성향의 미초타키스 총리는 진보 성향 대통령 지명에 같은 집권당 내에서도 불만을 가질 이가 많겠지만, 현재 기후위기가 주요 정치의제로 떠오르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 그의 환경보호 전력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측근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제위기에서 점차 벗어나 회복 중인 현 단계에서 초당적인 개혁적 인사 영입으로 그리스의 ‘재탄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고 평가받는다. 그리스에서 실질적인 권한은 총리에게 있고, 대통령의 권한은 헌법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공식 대표로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이며 강력한 상징적 권력을 지닌다. 통상적으로 그리스는 유럽연합 국가 중 여성의 정치 진출 비율이 매우 낮은 국가로 알려졌다. 그리스 의회에 진출한 여성의 비율은 18%로 유럽연합 평균 31.5%에도 못 미친다.

지난해 12월 세계 최연소 여성 총리로 선출되며 한국에서도 상당히 주목을 받았던 핀란드의 산나 마린 또한 오랜 기간 환경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이에 맞는 정책을 펼쳐왔다. 2006년 중도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2017년부터 현재까지 당 부대표를 역임해 오고 있는 마린 총리는 2012년 27세의 나이에 시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2008년부터 환경 및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 다수의 글과 신념을 자신의 블로그 및 소셜미디어를 통해 피력해 왔고, 2015년부터 핀란드 의회 환경위원회에서 활동해 왔다.

2019년 6월부터 교통통신장관직을 맡았던 그는 화석연료산업에서 완전히 벗어난 대중교통수단의 설치를 위해 필요한 로드맵을 제작하고자 실무그룹을 구성하도록 조치했다. 지난해 11월1일부터 활동해온 이 그룹은 탄소배출을 줄이는데 필요한 효율적인 정책을 마련하고자 정부 내 각 부처, 환경단체, 노조, 사기업 등 다양한 성격의 단체를 회원으로 초청했다. 올 가을 총회를 열어 로드맵을 토론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마린 총리는 2011년 이래 다수의 총선 캠페인에서 기후와 환경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루며 기후변화법 제정과 함께 이를 정부 정책으로 수용할 것을 촉구하는 행보를 해왔다. 그와 다수 의원들의 ‘탄소중립’을 위한 노력의 결과, 2015년 6월 일반적인 탄소배출거래시스템에 포함되지 않는 교통과 농업부문의 배출감축을 의무화하는 기후변화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2011년 3월 그가 소개한 자신의 캠페인에는 “기후변화는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우리의 중요한 정치적 과제”라며 그간 정치권이 이에 대한 마땅한 책임의식 없이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해오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모든 분야의 정책에서 기후변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2019년에는 토론회에 참가해 지속가능한 친환경 투자와 환경오염의 주범을 구별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기존의 녹색평가시스템 이외에도, 환경과 기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투자에 관한 비권고용 참고자료를 만들자는 취지다.  

마린 총리는 1월22일, 총리 임명 후 첫 국제무대 격인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에 참가해 기후에 관한 현안을 논의했다. 21일부터 24일까지 열렸던 제50회 다보스 포럼의 주제는 ‘지속 가능하고 화합하는 세계를 위한 이해 관계자들’이며, 기후위기 문제가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북극에 관한 여러 현안을 논의하는 정부 간 협의 기구인 ‘북극 이사회(Arctic Council)’ 토론회에 참가한 마린 총리는 북극의 해빙을 인류의 총체적인 위기로 여기지 않고 이윤 추구를 위한 비즈니스 기회로만 보는 근시안적인 시각을 비판했다. 핀란드의 국영방송 YLE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앨 고어 전 부통령도 함께 참석한 이 자리에서 그는 핀란드 정부가 2035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우리 핀란드 정부는 인류가 직면한 최대 위기인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도 “더 많은 것들을 더 신속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기후변화와 싸우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기술과 비즈니스, 일자리 창출, 웰빙에도 도움이 되는 호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관점도 제시해 환영을 받았다.

 

‘여성이 번성하면 지구도 번성한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지난해 10월16일 슬로바키아의 첫 여성 대통령인  카푸토바에 대한 칼럼을 통해 공익변호사로 환경 문제에 오랫동안 헌신한 그의 열정을 자세히 소개했다. 앤 애플바움 칼럼니스트는 “모든 나라에 카푸토바가 필요하다”며 “다른 나라의 정치인들이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는 2016년 4월 골드만환경재단에서 환경운동가에게 주는 세계 최대상인 골드만환경공로상을 받을 정도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카푸토바 대통령의 대표적인 환경운동은 자신의 고향이자 거주지였던 슬로바키아의 페지녹(Pezinok)에서 새로운 쓰레기 매립장 건설을 막고, 올바른 환경법을 마련한 것이다. 페지녹은 와인 생산이 주요 산업인 아름다운 도시지만, 1960년대부터 적절한 허가 및 환경보호장치 없이 서유럽의 쓰레기 매립지 역할을 해 왔다. 구 매립지가 쓰레기로 가득해지자 새로운 매립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막강한 인맥과 재력을 가진 개발자는 도시 내 쓰레기 매립지를 금지하는 시(市) 조례도 어기고, 주민공청회도 열지 않은 채 건축허가를 받아냈다.

이런 와중에 주민들은 거주지에 지나치게 가깝게 쓰레기가 오랫동안 쌓이다 보니 땅속으로 스며든 독성화학물질 등으로 인해 암·백혈병·호흡기질환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특히 이 지역의 백혈병은 자국 내 평균 발병률보다 무려 8배나 높았다. 당시 변호사였던 카푸토바 대통령은 2명의 지인이 동시에 암 판정을 받자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VIA LURIS’라는 환경단체를 통해 자체 지역신문도 제작 배포하고, 집회 및 콘서트, 사진전시회 등도 열고, 각종 소송을 제기하며 14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싸웠다. 결국 2013년 슬로바키아 대법원은 신규 쓰레기 매립지 허가를 불허하며 시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몇 달 전 EU 내 최고 사법기관인 유럽연합사법재판소가 ‘환경에 영향을 주는 정부의 결정에는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한 판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후 이 판결의 일부 결정은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에도 법률적인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다. 14년이 걸린 페지녹의 승리는 1989년 벨벳혁명 이후 최대의 시민저항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수정당인 프로그레시브 슬로바키아당의 후보로 2018년 3월 대선 캠페인을 시작한 카푸토바는 1년 후, 58.40%의 득표율을 자랑하며 자국 내 최초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대선후보 TV 토론회에서 ‘듣보잡’이라는 등 상대 후보의 무례와 인신공격에 개의치 않고, 차분하고 절제된 성숙한 소통방식을 보여주어 네거티브선거에 염증을 내던 유권자들로부터 급격한 인기몰이를 하며 성공한 케이스다. 그는 슬로바키아 엘리트 지배층 내의 부패와 인맥주의를 비판하고, 사법개혁을 포함한 사회개혁을 주장해왔다. 아울러 관용과 열린사회의 가치를 존중하며 ‘반이민 반외국인 반난민 반성소수자’로 점철되는 현지 보수 및 네오파시스트 극우정당과의 싸움에서도 이기게 된다. 카푸토바 대통령은 여전히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다. 슬로바키아도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실권은 총리에게 있지만, 최근 대통령의 법률거부권을 인정하게 되면서 대통령의 정치적 권한이 늘어났다

‘여성이 번성하면 지구도 번성한다’는 격언처럼 산적한 환경과 기후 문제 해결을 위한 여성 리더들의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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