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이 한국 축구를 바꾸기 시작했다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02 10:00
  • 호수 1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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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0 월드컵 준우승 이어 U-23 아시아 챔피언십 퍼펙트 우승, 그 배경은 선수 육성과 감독 선임 시스템 정착

경자년 한국 축구의 문을 가장 먼저 열고 나간 ‘김학범호’가 우승 트로피를 안고 돌아왔다. 김학범 감독이 이끄는 23세 이하(U-23) 축구 국가대표팀은 1월8일부터 26일까지 태국에서 열린 2020 AFC(아시아축구연맹) U-23 챔피언십에서 6전 전승으로 정상에 올랐다. 당초 4강 진출을 통해 2020 도쿄올림픽 본선행 티켓 획득을 지상목표로 삼았던 것을 뛰어넘어 사상 첫 우승까지 일궈낸 기대 이상의 쾌거였다. 그것도 아시아 강호인 중국·이란·우즈베키스탄·요르단·호주·사우디아라비아를 차례로 격파한 퍼펙트 우승이었다.

김학범 감독은 지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이어 다시 한번 능력을 발휘하며 재평가받았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좋아지는 조직력과 선수 개개인의 경기력이 인상적이었다. 참가국 중 가장 많은 득점(10골)과 두 번째로 적은 실점(3골)을 한 팀이기도 했다. 그만큼 공수 밸런스가 탁월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필드 플레이어 20명을 모두 골고루 기용할 정도로 과감한 로테이션 전략으로 늘 상대보다 체력적 우위를 점했다. 아시안게임 당시 단기 토너먼트를 이미 체험한 김 감독은 더 능숙한 운영전략을 보였다. 철저한 계획과 준비가 만든 결과물이었다.

1월27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2020 AFC U-23 챔피언십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결승전. 연장 후반이 종료되자 벤치를 지키던 김학범 감독과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뛰어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1월27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2020 AFC U-23 챔피언십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결승전. 연장 후반이 종료되자 벤치를 지키던 김학범 감독과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뛰어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비주류’ 김학범을 택한 감독 선임 프로세스

한국 축구계에서 김학범 감독은 철저한 비주류였다. 선수 시절 국가대표 근처에도 못 가본 그는 현역 은퇴 후 축구계를 떠나 2년간 은행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93년 실업팀 국민은행에서 코치로 시작해 차근차근 올라간 그는 성남 일화에서 최고의 조력자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고(故) 차경복 감독을 보좌하며 훈련·전술을 이끈 그는 직접 비디오 분석을 독학하고, 스포츠생리학 박사학위를 따는 등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K리그 3연속 제패의 특급 조연이 된 그는 2005년 드디어 감독직을 맡았다. 2006년 다시 한번 K리그 우승을 이끈 그는 당대 최고의 축구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에 빗대 ‘학범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국내 최고의 전략가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2008년 성남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그를 찾는 팀은 선택지가 충분치 않은 시·도민구단뿐이었다. 50대 중반 나이에 비주류·강성 이미지가 부담스럽다는 반응이었다.

그런 그를 주목한 것은 그해 새롭게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장에 선임된 김판곤 부회장이었다. 2018년 1월 중국에서 열린 U-23 챔피언십에서 한국은 부진을 거듭하며 4위를 기록했다. 4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에, 3·4위 결정전에서 카타르에 완패를 당했다. 당장 8월에 열릴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현 상태로는 어렵다고 판단한 김판곤 위원장은 김봉길 감독을 과감히 경질했다. 그는 객관적이고 세부적인 검증을 통해 새 감독을 선임하겠다고 했고, 그 선택이 김학범 감독이었다.

김판곤 위원장은 김학범 감독 선임 후 언론 브리핑을 통해 새로운 감독 선임 프로세스 내용을 공개했다. 프로팀과 각급 대표팀에서 실적을 낸 감독을 대상으로 1차로 10명의 후보군을 추렸고, 선임위원회 산하 3개 소위원회(기술연구그룹·스포츠과학·스카우트)의 평가 보고서, 외부 네트워크의 의견으로 후보를 좁혀갔다. 실체적인 경기력 분석을 바탕으로 김 위원장이 직접 개별 미팅을 가지며 최종 후보에 대한 평가에 돌입했다. 김학범 감독은 그 미팅에서 지난 대회에 대한 보고서 수준의 상세 리뷰와 자기 견해, 그에 따른 로드맵을 유일하게 제시하며 확신을 안겨줬다. 과거 기술위원회가 낙하산 인사, 거수기 조직이라는 비판을 받던 것과는 180도 다른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절차를 보여준 선임이었다.

환갑을 앞두고 처음으로 각급 대표팀을 맡은 김학범 감독은 강한 의욕을 보이며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참가한 두 대회에서 모두 최고의 성과를 냈다. 평가절하된 지도자를 물밑에서 끄집어낸 프로세스와 시스템의 중요성을 보여준 결과물이다. 대한축구협회는 이후 남녀 A대표팀, U-20 대표팀 등 각급 대표팀 감독 선임에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그 결과 201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시작으로 2019년 U-20 월드컵 준우승, U-17 월드컵 8강 등 주요 국제대회에서 잇달아 호성적을 내는 중이다.

축구협회가 실력 중심의 감독 선임 시스템을 구축했다면 K리그는 화수분 유스 시스템으로 재능 있는 선수들을 계속 배출하고 있다. 이번 U-23 챔피언십에 출전한 23명의 선수 중 K리그 소속은 19명이다. K리그 유스 출신도 14명이었다. 양쪽 모두 해당하지 않는 선수는 골키퍼 안준수가 유일했다. 23명 중 22명이 K리그 산하 시스템에서 성장했거나, K리그에서 기량을 끌어올렸다는 뜻이다.

 

K리그 유스 시스템, 빈틈없는 스쿼드 만들어

이전 대회들과 비교하면 성과가 확실히 두드러진다. 올림픽 최종예선을 기준으로 2012년에는 K리그 소속이 16명, 유스 출신은 7명이었다. 2016년에는 K리그 소속이 15명, 유스 출신은 12명이었다. 지난 U-20 월드컵 때도 21명 중 18명이 현 K리그 소속이거나 산하 유스 출신이었다. U-17 월드컵 때도 21명 중 17명이 해당됐다. 한국 축구의 핵심 선수가 K리그 산하에서 배출된다는 뜻이다.

K리그 운영 주체인 프로축구연맹은 2008년부터 K리그 유스 시스템 의무화를 추진했다. 각 구단은 의무적으로 12세, 15세, 18세의 산하 유스팀을 두고 선수를 육성해야 한다. 이를 보조하기 위해 프로 계약 가능 연령을 만 18세에서 17세로 하향 조정했고, 만 17세 선수들이 성인팀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준프로계약을 만들었다. 유소년 클럽 평가인증제 도입, 꾸준한 유소년 지도자 교육 및 연수를 추진하며 선수 육성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다.

육성 전략의 방점은 22세 이하 의무출전 제도였다. K리그 경기에 선발 명단과 대기 명단에만 22세 이하 선수 각 1명씩을 둬야 하는 이 제도로 각 팀 유스 출신 유망주가 성인 팀에 안착하는 케이스가 늘어났다. 당장 이번 대회에서도 이동경·이동준·김진규·김진야·조규성·오세훈·정태욱·송범근 등이 제도의 혜택을 봤다. 지난 시즌 30경기 이상을 뛴 선수가 10명, 20경기 이상을 뛴 선수가 7명으로 4년 전에 비해 무려 3배 가까이 되며 좋은 경기 감각을 유지했다. 김학범 감독도 “1부 리그, 2부 리그가 중요한 게 아니다. 선수들이 꾸준히 경기를 뛰며 체력과 기량을 유지했기에 이번 대회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인정했다.

2019년 기준 K리그1 각 팀별 평균 유스 출신 선수는 31.9%에 달했다. 순수한 각 팀 산하 유스 출신 선수는 19.4%였다. 이는 스페인·프랑스·독일·잉글랜드 등 유럽 팀보다 더 우월한 결과물이다. 프로축구연맹은 “K리그 경쟁력이 강화되고, 각급 대표팀이 호성적을 거두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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