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가 공포를 이긴다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15 16:00
  • 호수 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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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 패배하지 않는 페미니즘이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와 페미니즘, 이런 주제로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마도 ‘그 둘이 무슨 상관인데?’라고 할지 모른다. 페미니스트라고 코로나19에 안 걸리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최근의 트랜스젠더 여성 여대 입학 파문을 보며, 이 둘이 반드시 무관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약하면 구성된 담론이 주는 공포다.

중국 우한시 사례와 달리 한국에서는 의심 환자도 매우 적고 확진자도 적다. 무엇보다 사망자가 없고 완치되는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거리엔 인적이 드물고 각종 행사를 취소한다. 왜 이렇게 두려워할까.

코로나19 공포의 위력은 그 바이러스가 실제 지닌 힘보다 훨씬 컸다. 부정확한 담론이 대세가 될 때 정확한 담론보다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의 공통점이 바로 공포감을 조장하는 것이다. 소문이 사람 잡고 나라 잡는 셈이다.

1월31일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 앞에서 한 시민이 딸과 함께 중국 우한 교민들을 환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1월31일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 앞에서 한 시민이 딸과 함께 중국 우한 교민들을 환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페미니즘의 특성

예전에 문학개론 시간에 공포와 불안을 구분하면서 이렇게 배웠다. 불안은 모르기 때문에 오고, 공포는 다가올 것이 무언지 알지만 저항할 수 없을 때 온다. 혼자 사는 여성에게 문밖의 발자국 소리는 불안을 주고, 남자의 고함과 문 두드리는 소리는 공포를 준다고 비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불안을 느끼기도 전에 공포부터 만난다. 너무 많은 불확실한 정보들이 쏟아지면서 불안을 극복할 지식보다 먼저 공포가 온다. 실체가 없는 공포와 실체가 있는 공포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아서, 일단 공포가 작동하고 나면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 아무 소용이 없어지곤 한다.

코로나19 공포가 실제 그 바이러스의 위력과 상관없이 퍼져버린 데는 공포를 조장하는 데 골몰하는 여러 언론의 위력이 컸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위험하다’는 담론도 아마 그렇게 공신력을 가장한 왜곡된 경로를 타고 흘렀을 것이다. 공기 중에 노출되면 얼마 살지도 못하는 바이러스 때문에 확진자가 벌써 오래전에 지나갔다고 해도 식당에 안 가고 시장에 안 가는 일은 ‘무지의 폭력’이 될 수 있다. 현대사회란, 무지가 곧바로 죄가 되는 사회다. 법을 모르면 범법자가 되고, 변화하는 사회의 문화를 못 따라가면 윤리적 죄인이 된다. 몰라서 두려우면 알면 되는데 말이다. 관념 속의 존재가 어떻게 실재의 산 인간을 소외시키는지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코로나19를 이기는 데 어떤 기여를 할까. 아주 단순하다. 공포에 패배하지 않고 실존하는 이웃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 하다못해 “모른다”는 이유로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페미니즘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나는 생각하니까.

트랜스젠더 여성과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 사람, 가까이 살거나 친분을 유지한 사람들이 트랜스젠더 여성을 위험시하는 일을 본 적은 아직 없는 것 같다. 지나가다가 트랜스젠더를 만났을 때, 그가 트랜스젠더임을 알아채는 사람도 드물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스스로 조심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간절하게 트랜스젠더 여성은 편견과 공격적 담론을 견뎠을 것이다.

아산과 진천 주민들이 우한에서 돌아온 동포들을 환대하던 플래카드가 많은 분들의 뇌리에 따스함으로 남았을 게다. 알지 못하는 위험을 상상하면서 ‘사람이 사람을 내치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자.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서. 페미니즘이 뭐 별건가? 사람처럼 살자는 이야기지. 사람을 바이러스 취급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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