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쓰는 말의 주인은 누구인가 [로버트 파우저의 언어의 역사]
  • 로버트 파우저 독립학자(《외국어 전파담》 저자) (jongseop1@naver.com)
  • 승인 2020.02.15 12:00
  • 호수 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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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철자법 개혁이 던지는 질문…언어를 만드는 것은 사용자

영어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어 철자법 때문에 고생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영어가 모어인 초등학생이나 모어가 아닌 성인 학습자 모두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자동완성 기능을 통해 잘못 입력한 글씨를 바로잡을 수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철자법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세계적으로 공통어 대접을 받고 있는 영어 철자법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노아 웹스터(왼쪽)는 영어 철자법 개혁에 성공한 유일한 인물이다 ⓒWikimedia Commons
노아 웹스터(왼쪽)는 영어 철자법 개혁에 성공한 유일한 인물이다 ⓒWikimedia Commons

영어 철자법은 왜 어려울까

그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영어의 성격과 역사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영어는 게르만어다. 그래서 같은 게르만어족인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웨덴어와 발음과 구조, 어휘 등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당연히 같은 어족의 언어를 모어로 삼고 있는 이들이 영어도 쉽게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영어는 다른 게르만어족에 비해 프랑스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066년경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노르만족이 영국을 침략하고 왕국을 세웠다. 줄곧 고대 영어를 사용해 오던 귀족 계급은 점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이들로 변화했다. 이후 노르만족의 지배가 고착화되면서 영국의 영어는 프랑스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특히 어휘 변화가 매우 컸다. 동시에 유럽 전역에 걸쳐 수많은 전문 분야가 점차 등장해 발전하면서 영국 역시 새로운 전문 용어를 만들어내야 했고, 이때 라틴어와 고전 그리스어를 적극 활용했다. 그 결과 영어는 게르만어족에 뿌리를 두긴 했지만 프랑스어와 라틴어의 어휘와 섞여 발전한 ‘잡탕어’가 되었다.

영어 철자법이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근대를 전후해 유럽에서는 본격적으로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각 나라마다 ‘국어’를 지정하고, 사전과 문법의 규칙을 만들어냄으로써 통일된 ‘말’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1635년 설립한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mie franaise)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 기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관리를 받기 시작하면서 어느덧 국어는 곧 그 국가의 힘과 품위를 상징하는 장치가 되었다. 이러한 점에 주목한 일본은 ‘근대화’를 지향하는 메이지 유신 이후 국어를 지정하고, 표준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영어권 국가는 하나같이 국어를 관리하는 국립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국가가 지정하는 ‘표준어’라는 개념도 없고, 철자법의 관리를 받을 일도 없었다. 영국이나 미국, 호주 등 영어를 주로 사용하는 나라에서는 뜻밖에도 법적으로 영어를 국어로 지정하지도 않았다. 간혹 지역 정부에서 지정하는 경우는 있는데, 그것조차 국어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의 50개 주 중 32개 지역에서 영어를 ‘공용어(official language)’로 지정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자법에 대한 불만조차 없었던 건 아니다. 이미 16세기부터 그런 불만은 고조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혁안이 몇 번 나오긴 했지만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상류층만 교육을 받았으니 대중을 상대로 하는 쉬운 철자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공감대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1755년 런던에 있는 몇몇 출판사들의 도움을 받아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1709~1784)의 유명한 《영어사전》이 출간됐다. 이로써 영어의 표준화가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국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라는 것이 눈여겨볼 지점이다.

그 후 18세기 말, 미국이 독립한 이후 노아 웹스터(Noah Webster·1758~1843)가 간소화된 ‘미국식’ 철자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미국식 철자를 포함한 첫 사전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1806년이다. 이 사전의 특징은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다. 우선 철자 표기를 가급적 발음에 가깝게 하고, 나아가 발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글자는 삭제했다. 예를 들면 기존에 ‘centre’로 썼던 영국식 표기에서 마지막 두 글자를 거꾸로 쓰게 해서 ‘center’로 바꿨고, ‘programme’에서 마지막 ‘me’가 발음에 영향을 주지 않으니 아예 삭제하고 ‘program’으로 바꿨다. 그 후 계속 수정과 보완 작업을 거쳐 1828년 《미국영어사전》이 탄생했고, 이 사전과 이를 바탕으로 만든 영어 교과서가 미 전역으로 보급되었다. 비로소 미국식 철자가 정착했고,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미국과 영국의 철자법은 차이가 있다.

18세기 중반부터 공교육의 확산으로 교육을 받는 인구가 폭발하면서 영어 철자법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더욱더 높아졌다. 187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철자법 개혁을 위한 학회가 설립되었고, 개혁운동을 주도했다. 개혁의 방향은 더 정확하게 발음을 반영하는 철자법, 발음과 관계없는 철자의 삭제였다. 예를 들면 ‘are’는 ‘ar’로, ‘give’는 ‘giv’로 바꾸는 식이었다. 그 밖에도 다양한 주장이 등장했다.

1854년 발표된 데저렛 문자는 모르몬교회를 중심으로 사용됐다. ⓒWikimedia Commons
1854년 발표된 데저렛 문자는 모르몬교회를 중심으로 사용됐다. ⓒWikimedia Commons

영어 철자법 개혁 성공은 노아 웹스터의 경우가 유일

한편으로 전혀 새로운 주장이 등장했다. 지금까지는 영어 알파벳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하지만 알파벳 26개 글자보다 훨씬 많은 44개의 음소(소리)가 있는 영어의 특성상 철자법을 개혁하는 데 알파벳이 한계가 있으니, 알파벳 자체를 바꿔보자는 주장이 새로 등장한 것이다.

18세기 말 미국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1706~1790)은 독립한 미국이 영국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도 언어 면에서 독립을 해야 하고, 그러자면 ‘미국식’ 영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알파벳을 중심으로 하되 기존 알파벳에서 6개 글자를 삭제하고 새로운 글자 6개를 도입해 26개 글자를 유지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이를 위해 웹스터와 의견을 교환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새로운 주장은 또 있었다. 영어의 음소 하나마다 글자 하나로 표기하면 더 쉽고 완벽한 철자법을 가질 수 있으니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기존의 알파벳을 포기하고 영어 음소에 맞춘 새로운 글자를 도입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1847년에 모르몬교회의 제2대 회장인 브리검 영(Brigham Young·1801~1877)은 새로운 문자 개발을 지시했다. 영어를 쓰지 못하는 유럽의 이민자를 위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데저렛대학(현재 유타대학교) 내에 위원회가 설립되더니, 1854년 새로운 데저렛 문자가 발표되었다. 이 문자는 38개 글자로 영어의 44개 음소를 표기했기 때문에 알파벳보다 영어 발음을 잘 반영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1845년 영국에서 개발된 새로운 영어 문자의 영향을 많이 받긴 했지만 브리검 영의 추진력 덕분에 15년 동안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지역 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1859년에 활자가 완성되자 지역 신문의 몇몇 기사와 《모르몬경》 등 몇 권의 책이 데저렛 문자로 집필되기도 했다. 하지만 데저렛 문자를 보급하려는 여러 노력에도 확산 및 정착까지는 한계가 있었고, 1877년 브리검 영이 사망한 이후에는 그나마 있던 관심조차 사그라들었다. 이 문자를 두고 당시 억압받던 모르몬교 신자의 단결과 외부 사회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한 도구로 자신들만의 영어 철자법을 가지려 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하고, 문자 모양이 비슷해 읽기가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영어 철자법 개혁의 역사에 매우 흥미로운 사례가 아닐 수 없다.

1755년 새뮤얼 존슨은 런던 출판사들의 도움을 받아 《영어사전》을 출간했다. ⓒWikimedia Commons
1755년 새뮤얼 존슨은 런던 출판사들의 도움을 받아 《영어사전》을 출간했다. ⓒWikimedia Commons

2차 대전 이후에는 철자법보다 독해 교육에 더 큰 관심

20세기 전반까지도 개혁운동은 활발했지만 대두된 여러 가지 방향 중 어느 것 하나로 압축하지 못했고,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오히려 철자법보다는 효과적인 독해 교육에 더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그동안 영어 철자법을 개혁하려는 여러 노력 중 성공한 사례는 노아 웹스터의 경우가 유일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영국과 다른 미국만의 철자법’을 만들겠다는 것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의 애국주의와 맞물려 개혁의 동력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 변화의 폭이 아주 크지 않은 한정된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그 대상이 되는 단어의 수가 비교적 적은 편이라는 점도 주효했다. 아울러 중앙정부가 국가 차원으로 새로운 철자법을 보급하는 방식이 아니라 학교를 유지하는 지방정부 중심으로, 민간 출판사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 역시 눈여겨볼 지점이다.

우리는 이쯤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가 쓰는 말의 주인은 누구일까? 영어 철자법 개혁의 역사를 보면 말의 주인은 왕이나 권력자가 아니다. 또한 진지한 관료나 똑똑한 학자들에 의해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 누구인가. 바로 사용자다. 21세기 초, 인터넷과 SNS의 확산으로 영어를 포함한 수많은 언어가 이곳저곳을 넘나들고 있다. 그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내고 수용하는 것 역시 다름 아닌 우리 자신, 바로 사용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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