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30대 그룹 총수 63%, 후계자 90%가 미국 유학파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0.02.20 10:00
  • 호수 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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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그룹 오너 일가 학력 전수조사 결과
재벌가 ‘필수 스펙’ 된 미국 학위

세대 교체기를 거치고 있는 재계에서 미국 대학 학위가 총수의 ‘필수 스펙’이 됐다. 총수는 물론 후계자로 거론되는 재벌가 자제들도 약속이나 한 듯 미국 학위를 갖추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시사저널은 현재 국내 30대 그룹(자산총액 기준)에서 오너가 있는 기업 총수와 후계자 등의 최종 학력을 전수조사했다. 24개 그룹 중 63%인 15곳의 총수가 미국 대학 출신이었다. 하지만 실제 체감되는 비율은 훨씬 높다. 국내파 총수들은 대부분 70세 이상 고령의 1~2세대이기 때문이다. 

최근 대기업 3~4세 경영이 본격화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비율은 향후 100% 가까이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후계 구도에 있는 ‘예비 총수’들은 물론 그 자녀들에게도 미국 유학은 필수로 여겨진다. 미국 유학파 총수·후계자 중 경영학 석사 출신이 상대적으로 많지만, 학교는 겹치는 곳 없이 골고루 분포돼 있다. 어느 대학이냐보다 미국에서 공부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러스트 정찬동
ⓒ일러스트 정찬동

‘유학파’ 총수 중 1명만 빼고 미국 대학 출신 

지난 1월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회관에서 열린 정부 신년합동인사회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53),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51), 최태원 SK그룹 회장(61), 구광모 LG그룹 회장(43) 등 4대 그룹 총수들이 한데 모여 화제를 모았다. 삼성, 현대차, LG의 세대 교체 후 앞으로 최소 10년간 한국 재계를 이끌어갈 이들 ‘빅4’는 모두 미국 대학 출신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서울대 동양사학 학사, 일본 게이오기주쿠대 경영학 석사를 거쳐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는 재벌가(家)에서 이른바 ‘이재용 코스’로 통한다. 최고 기업의 화려하면서 안정적인 후계자 학력 관리 방식이란 의미다. 

빅4 중 경영 전면에 나선 지 가장 오래된(1998년 취임) 최태원 회장은 고려대 물리학과 졸업 후 미국으로 가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학사,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박사 통합과정을 수료했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와 미 샌프란시스코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구광모 회장은 서울 영동고를 졸업한 뒤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나섰다. 로체스터공대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2006년 LG전자 재경 부문 대리로 입사했다. 이듬해 스탠퍼드대 경영학 석사 과정에 입학해 다시 미국 유학생활을 이어가다가 중퇴했다. 

다른 재벌 총수들도 미국 유학파 일색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66)은 일본에서 태어나 아오야마가쿠인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석사 학위(경영학)는 미 컬럼비아대에서 취득했다. 김승연 한화 회장(69)은 경기고에 다니던 중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네소타주에서 고교 과정을 마치고 멘로대에 입학, 경영학을 전공했다. 이어 드폴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구자홍 LS니꼬동제련 회장(LS 동일인·75)은 프린스턴대 경제학 학사 출신이다. 

허창수 GS그룹 명예회장(73)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 세인트루이스대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지난해부터 회장직을 이어받은 동생 허태수 회장(64)도 고려대(법학과)-미국 석사(조지워싱턴대 경영학) 과정을 밟았다. 

이 밖에 조원태 한진 회장(46)은 서던캘리포니아대, 박정원 두산 회장(59)은 보스턴대, 이웅열 전 코오롱 회장(65·동일인 지위는 유지)은 조지워싱턴대에서 각각 경영학 석사 학위를 땄다.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86)은 일리노이공대 화학공학 석사다. 이준용 대림 명예회장(83)은 덴버대에서 통계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후계자들 미국 유학, 이제 필수 코스 

하버드대에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63)은 최고경영자(AMP) 과정을,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49)은 스페셜스튜던트 과정을 수료했다. 조사 대상인 24개 그룹 중에서 미국 외 지역으로 유학을 다녀온 총수는 김남구 한국투자금융 부회장(58·일 게이오기주쿠대 경영관리학 석사)이 유일했다. 

30대 그룹의 후계 구도를 들여다보면 미국 유학 붐과 쏠림 현상이 더욱 명확해진다. 취재 가능한 정보만 모아 봐도 미국 유학파 총수 15명 중 10명의 자녀가 미국에서 수학했다. 유학하지 않은 총수 가운데 확인된 8명도 자녀는 미국 학교로 보냈다. 이들 자녀는 모두 미래에 그룹을 이끌 수 있는 ‘총수 후보군’에 속했다. 

국내에서 학업을 마친(이화여대 생활미술학과 졸업) 이명희 신세계 회장(78)은 그룹의 미래를 이끌 아들 정용진 부회장(53·브라운대 경제학 학사)과 딸 정유경 총괄사장(49·로드아일랜드디자인학교 그래픽디자인 학사)을 모두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게 했다. 서울대 경제학 학사인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70)의 장남 정기선 부사장(39)은 미 스탠퍼드대 경영학 석사, 고려대 법학 학사인 CJ 이재현 회장(61)의 장남 이선호 CJ제일제당 부장(31)은 미 컬럼비아대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80), 장형진 영풍그룹 전 회장(75), 김홍국 하림 회장(64),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68),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76)도 자신은 국내 대학을 졸업했지만, 후계자는 줄줄이 미국 학교로 보냈다. 

조사 결과 30대 그룹의 특정 대학 선호 현상이 확인되진 않았다. 30대 그룹 총수들이 졸업한 미국 대학은 하버드대 3명 외엔 겹치지 않았다. 조사 대상 자녀들 출신 대학 중에선 스탠퍼드대가 5명으로 가장 많았고 컬럼비아대가 3명으로 뒤를 이었다. 신동빈 회장과 장남 신유열씨는 컬럼비아대 경영학 석사 동문이었다. 

1월2일 열린 정부 신년합동인사회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 구광모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이 참석했다(오른쪽부터). 이들은 모두 미국 유학파다. ⓒ연합뉴스
1월2일 열린 정부 신년합동인사회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 구광모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이 참석했다(오른쪽부터). 이들은 모두 미국 유학파다. ⓒ연합뉴스

“오너 경영에 선진 시스템 접목하는 과정” 

총수와 자녀들이 선택한 유학 전공은 역시 경영학이 주를 이뤘다. 경제학, 국제정치학, 공학, 통계학 등 기업 경영에 도움이 되는 여타 전공도 있었다. 후계자들도 경영학 전공 비율이 높은 것은 비슷했는데 호텔경영학, 법학, 디자인학, 생명정보학 등도 눈에 띄었다. 

재벌 총수와 후계자들이 너도나도 미국 유학길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조사본부장은 “과거와 달라진 환경에서 경영 수업을 제대로 받으려다 보니 비즈니스 스쿨 쪽으로 특화된 미국을 선택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본부장은 “기업 규모가 커지면서 예전처럼 ‘하면 된다’ 정신이나 주먹구구식으로 경영을 해선 안 된다. 그렇기에 시스템을 제대로 갖춰 큰 기업을 운영하는 미국의 흐름을 배우고 오려는 것”이라며 “대기업들이 (한국 특유의) 오너 경영의 장점은 어느 정도 가져가면서 미국식 선진 경영을 접목하는 과정에 있다”고 덧붙였다. 

갈수록 글로벌화하는 경영 환경 속에서 기업과 사회는 총수를 더 이상 궁궐 속 황제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전 세계로 나가 글로벌 인맥을 만들고 실적을 내야 겨우 편견을 뚫고 경영 능력을 인정받는다. 최고경영자(CEO)는 물론 일반 직원들 중에서도 글로벌 감각과 실력을 갖춘 유학파가 많아졌다. 

아울러 국제무대에서 총수가 기업의 얼굴 역할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지는 추세다. 현대차는 2017년 초 정몽구 회장에서 정의선 수석부회장으로 경영권이 확실히 이동했음을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에서 알렸다. 바로 정 수석부회장의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통해서다. 정 수석부회장은 2017년 1월4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17 미디어 콘퍼런스에 기조연설자로 나서 500여 명의 국내외 취재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15분간 유창한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직접 소화했다.  

 

재계 4세 넘어오며 조기 유학 분위기 가속화 

유학은 재벌가 교육의 오래된 특징이다. 해방 전후 극심한 혼란기에 대기업을 일군 창업주들은 외국과의 교류, 선진 문물 도입 등을 강조 또 강조했다.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는 “창업주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는 작고 자원이 없는 나라니까 바깥세상에 나가야 한다’는 신념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자녀 교육에도 적용됐다. 2세대부터 상당수가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전 미국, 일본 등에서 수학했다. 

오너 2세대 시대가 저물어가고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된 지금도 재벌가 자제들의 유학은 활발하다. 아예 선택이 아닌 필수 요건이 됐다. 일본 유학은 거의 자취를 감췄고 미국으로 집중됐다. 더 나아가 요즘 트렌드는 조기 도미(渡美)다. 3세까지 주로 한국에서 중·고등·대학교 과정을 마친 후 미국으로 나갔다면 4세 이후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한국을 떠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일각에선 재벌가의 미국 유학에 ‘사생활 노출 회피’ 목적이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스마트 기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의 발달로 유명인들의 과거 행적, 사생활 등이 알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은 오너 경영의 장점과 함께 오너 리스크도 항상 공유하고 있다.  

오세형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본부 팀장은 “대기업, 중견기업 등에서 오너 일가가 아닌 일반 임원들도 유학파로 바뀌고 있는 흐름이다. 재벌가의 유학 자체를 비판할 순 없다”면서도 “대기업 후계자이자 한국 사회 구성원으로 지내며 적절한 관심과 비판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을 원천 차단하려는 의도도 알게 모르게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 팀장은 “(유학을 통해) 재벌 체제의 장점과 미국의 선진 경영 시스템을 접목하고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며 “대기업의 행태를 보면 정작 미국에서 경영학이나 경제학의 본질, 자본주의 원칙 등을 배워 오는 총수는 없는 듯하다”고 꼬집었다. 홍성추 《재벌 3세》 저자도 3세 이후의 재벌가 자제들을 가리켜 “온갖 특혜를 누리며 살기만 했고 기업 경영과는 거리를 둔 채 유학 등의 시간을 거치며 한국의 사회·경제 전반에 대해 익숙지 않다”며 “입사 후 바로 임원이 되고 차후에 오너가 될 이들에게 바른말을 해 줄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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