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도 인정한 봉준호, 또 다른 프랑스 영화제 ‘세자르’는 외면하나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23 10:00
  • 호수 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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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200명 “세자르, 남성‧백인 중심” 비판…논란되자 이사회 전원 사퇴

한국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쾌거로 축제 분위기라면, 프랑스는 국내 영화제인 세자르상(賞) 시상식을 코앞에 두고 한창 야단법석이다. 행사를 주관하는 협회의 이사진이 영화제를 며칠 앞두고 일괄 사퇴하는 등 영화보다 그 외적인 사정들로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2월11일(현지시간) 프랑스의 배우와 감독, 제작자 등 200여 명의 영화인들은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에 공개서한을 게재했다. 시상식을 불과 2주 앞둔 시점에 세자르 영화제를 주관하고 있는 ‘영화기술아카데미위원회’의 ‘개혁’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성범죄 연루 혐의를 받고 있는 프랑스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신작 《장교와 스파이》가 이번 세자르상 시상식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일부 영화인과 시민단체의 반발을 사고 있다. ⓒ연합뉴스
성범죄 연루 혐의를 받고 있는 프랑스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신작 《장교와 스파이》가 이번 세자르상 시상식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일부 영화인과 시민단체의 반발을 사고 있다. ⓒ연합뉴스

“폴란스키는 이번 사태의 본질 아냐”

프랑스의 영화제는 세계 3대 국제영화제로 통하는 ‘칸영화제’와 프랑스 영화들을 대상으로 한 ‘세자르영화제’로 나뉜다. 세자르영화제의 국제적 위상은 칸영화제보다 못하지만, 프랑스 자국 영화를 위한 자리니만큼, ‘프랑스의 오스카’로 불리며 오랜 세월 최고의 권위를 누려왔다. 1976년 시작돼 올해로 45회에 이르는 역사 있는 시상식이다. 이번 세자르상 시상식을 둘러싼 논란이 여론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작품 《장교와 스파이》가 12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는 보도가 나오면서부터다. 성범죄 혐의에 대한 추가 폭로가 이어지고 있는 감독의 영화가 권위 있는 시상식의 최다 노미네이트 작품이 된 것이다. 즉각 여성단체들의 강한 반발과 함께 시상식 보이콧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아울러 세자르상 선정 방식과 그간 협회 운영의 불투명성까지 도마에 오르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물론 2월11일 영화인들이 공개서한까지 게재하며 집단으로 들고일어나게 된 계기가 비단 로만 폴란스키 감독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영화인들이 한목소리로 세자르상 위원회를 직접 비판하고 나선 것은 두 명의 신인 배우에 대한 차별 때문이 더 컸다. 세자르상 시상식의 일환으로 매년 마련되는 신인 배우들을 위한 디너파티에 2명의 남녀 신인 배우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초청이 거절된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동료 배우들과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영화계 인사들은    세자르상 위원회의 폐쇄적이고 카스트적인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성명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영화 역사학자 레지스 뒤부아는 “프랑스 영화계는 불투명하고, 파리지앵 위주이며, 남성 그리고 백인 중심”이라고 일갈하며, 이번 사태를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프랑스 시사 월간 ‘리뷰 데 두 몽드’의 편집인 발레리 토라니앙은 “인맥주의가 프랑스 영화계를 망치고 있다”고 지적하며, “폴란스키의 후보작 논란은 케이크 위의 체리 장식일 뿐 사태의 본질이 아니다”고 일축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을 둘러싼 논란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이다.

2월28일 제45회 세자르상 시상식이 프랑스 파리 시내 공연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연합뉴스
2월28일 제45회 세자르상 시상식이 프랑스 파리 시내 공연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연합뉴스

“협회의 엘리트주의·폐쇄성 개혁하라”

2월11일 르몽드 공개서한을 통한 영화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협회의 엘리트주의와 폐쇄성을 즉각 개혁하라”는 것이었다. 현재 세자르상 시상식을 주관하는 프랑스의 ‘영화기술아카데미위원회’는 4680명(2019년 11월4일 기준)의 회원으로 구성돼 있다. 회원 자격은 영화계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며, 입후보 시점을 기준으로 지난 5년간 3편 이상의 장편영화에 참여한 경력과 기존 회원 2명의 추천이 있어야 한다. 연회비는 60유로, 주된 역할은 매년 ‘세자르상 선정’을 위해 투표하는 것이다. 회원 명단은 외부로 공개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영화기술아카데미위원회는 미국의 오스카상을 주관하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위원회이기도 하다.

이번에 비판의 대상이 된 위원회의 회장은 70세의 알랭 테르지앙으로 자신이 조연으로 영화에도 출연한 바 있는 영화 제작자다. 17년째 회장직을 맡아왔으며 이번 사태로 이사진과 함께 퇴진했다. 그에 대한 비판의 요지 역시 지금까지의 운영에 대한 ‘불투명성’이었다. 공식적으로 협회를 관리하는 주체는 ‘프랑스영화진흥원(APC)’으로 돼 있다. 프랑스영화진흥원은 역대 전직 협회장, 영화계 주요 인사 그리고 미국의 오스카상 수상자 등 47명으로 구성돼 있다. 조직의 복잡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프랑스영화진흥원에 대한 구성은 영화기술아카데미위원회 이사회가 맡고 있는데, 이사회 구성원은 영화기술아카데미위원회 역대 회장들과 일부 유명 회원으로 구성된다. 영화 《남과 여》의 감독으로 유명한 클로드 를르슈와 《Z》 《뮤직박스》 등으로 유명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도 이사회의 일원이다. 이번 사태에서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불투명성과 함께 도마에 오른 것은 협회 회원들 중 여성의 비율이다. 현재 전체 회원의 35%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태 초기, 알랭 테르지앙 회장은 반발을 진정시키기 위해 부랴부랴 여성 회원 비율을 50%로 끌어올리겠다는 개선책을 내놓기도 했다.

세자르상 시상식이 임박한 시점임에도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위원회의 실질적 운영을 맡아온 이사회는 2월13일 전원 사퇴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아울러 이사회는 프랑스 영화산업을 관장하는 기관인 ‘국립영화센터(CNC)’ 보호 아래 사태가 진정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주관 부처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문화부의 프랭크 리에스테르 장관은 “새로운 집행부는 투명성, 다양성 그리고 성적 평등성 등 더 많은 민주적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할 것”이라며 거들고 나선 상태다.

최근 미국의 오스카상 4개 부문을 수상하며 올해 오스카상의 주인공이 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지난해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이 영화에 쏟아진 찬사만큼 뜨거웠던 것은 ‘오스카의 새로운 선택’이라는 점이었다. 백인들의 영화축제로만 불리던 미국 아카데미상의 새로운 기점이 돼 준 것이다. 지난해 칸영화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유력한 수상 후보였던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페인 앤 글로리》가 아닌 젊은 비백인 감독 봉준호의 《기생충》을 선택함으로써 칸은 노쇠하고 보수적이라는 이미지를 새롭게 바꿨다.

과연 프랑스의 세자르상도 같은 모습을 연출할 수 있을까. 일단은 이번 논란으로 인해 그 계기는 확실히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월28일 시상식이 어떤 분위기로 치러질지, 또 그 후 프랑스의 영화기술아카데미가 어떤 대안을 내놓을지 수상작의 면면보다 더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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