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해 보자 싶었다”
  • 하은정 우먼센스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22 10:00
  • 호수 158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데뷔 20년 만에 영화 《정직한 후보》 원톱 주연 맡은 라미란

라미란을 좋아한다. 그녀는 히어로다. 그녀가 첫 주연을 맡았을 때 (친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일처럼 기뻤다. 대한민국 상업영화에서 평범한 외모의 40대 여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확률적으로 희박한 일이다. 그녀의 첫 주연작은 지난해 개봉한 영화 《걸캅스》(이성경과 투톱 주연)다. 이 작품은 애초부터 라미란을 두고 시나리오를 썼을 만큼 ‘라미란을 위한, 라미란에 의한’ 작품이었다. 당시 그녀는 인터뷰 자리에서 “영화 48편, 제 나이 마흔다섯, 영화 시작한 지 20년 좀 넘었는데 ‘첫 주연’을 맡게 된 라미란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기자에게도 그녀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자기소개였다.

평소 라미란이 자주 하던 말이 있다. “가늘고 길게 가고 싶다”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다”. 정말 버티니까 이루어졌다. 라미란은 2005년 《친절한 금자씨》로 데뷔한 이후 쉼 없이 달려왔다. MBC 《진짜사나이》, KBS 《언니들의 슬램덩크》 《전지적 참견 시점》 등 예능 프로그램을 비롯해 tvN 《응답하라1988》 《막돼먹은 영애씨》 《블랙독》까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이제는 그를 롤모델로 꼽는 후배도 적지 않다. ‘희망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그녀가 이번엔 단독 주연을 맡았다. 영화 《정직한 후보》는 거짓말이 가장 쉬운 3선 국회의원이 선거를 앞둔 어느 날 하루아침에 거짓말을 못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코미디다. 라미란은 극 중 4선을 앞둔 국회의원 주상순 역을 열연했다. 거짓말만 일삼던 인물인데 졸지에 ‘진실의 입’을 갖게 되면서 의도하지 않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직해져 인생 최대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김종욱 찾기》(2010), 《부라더》(2017)의 장유정 감독이 브라질 영화를 리메이크했는데, 장 감독은 원작의 주인공을 남자에서 여자로 바꿀 만큼 라미란에게 신뢰가 있었다. “라미란이란 배우는 생각지도 못한 코미디 ‘호흡’을 써요. 그러면서도 인간미가 있고 성숙한 면이 있죠. 캐릭터를 만들다 보니 라미란이 아니면 어렵겠더라고요. 그렇게 주인공 성별이 바뀌어 버렸죠.” 장유정 감독의 말이다.

ⓒNEW 제공
ⓒNEW 제공

《정직한 후보》를 선택한 이유는.

“코미디 대본이 쑥쑥 읽히기 힘든데 잘 넘어가더라. 원작을 굳이 안 봐도 될 만큼 ‘현지화’가 잘돼 있어서 공감이 됐다. 코미디도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연기하는 배우도, 보는 관객들도 재미있다. 그런 점에서 만족도가 높았다. 어떤 분들은 정치 풍자라고 느끼실 수 있지만 우리는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그저 코미디로 즐겨주셨으면 한다. 나도 어떻게 하면 웃음을 유발할 수 있을까를 많이 생각하며 연기했다.”

 

분량이 많다. 라미란의 원맨쇼 아닌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배우들이 모두 다 잘해 준 결과물이다. 물론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어휴, 내가 계속 나오네’ 싶기는 했다. 근데 또 도전정신이 생겼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켜줄 때 한번 해 보자 싶었다. 매 신마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연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거짓말’을 못 하게 되는 상황이 닥쳐온다면.

“영화 속 주인공처럼 거짓말을 못 하게 되더라도 두려움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동안 거짓말을 하면서 살진 않았다. 잠깐 살더라도 편하게 살아, 주의다. ‘내가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해 보면, 결국 ‘나한테도 솔직해지는 것’이다. 작품 선택에 있어서도 배우로서 내게 좋은 작품이 필요한가, 혹은 돈이 필요한가, 아니면 좋은 사람이 필요한가, 거기에 맞춰서 선택한다. 그 솔직함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기를 하면서 느낀 점은.

“누구나 다 힘들게 산다. 내가 연기한 국회의원도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아야 하니 힘들게 살지 않겠나. 연예인도 사랑을 받아야 하는 작업이라 이미지를 만들기도 한다. 많은 분들이 제게 ‘사람 좋아 보인다’고들 하시는데 실제로는 조용한 사람이다. TV에 많이 출연한 이후 많은 분들이 날 알아봐주시고 특히 이웃집 어머님들은 날 만나면 팔을 안 놔주신다(웃음). 저를 편하고 친근한 우리 이웃집 사람 같다고 하는데, 알고 보면 샤이한 이웃집 사람이다. 하하.”

 

인터뷰할 때마다 느끼는데, 참 솔직해서 좋다.

“그런 이미지라 편하다.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고 나서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나. 나는 딱 이 정도의 사람이다.”

 

코미디 연기가 사실 어렵다. 부담은 없었나.

“사실 주연이란 자리보다는 코미디라는 장르적인 것이 더 부담이 됐다. 사람을 울리는 것보다 웃기는 게 훨씬 어렵다. 게다가 나는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고 무딘 성격이다. 늘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큰 법이라 ‘코미디 장인’이라는 수식어는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코미디는 정답이 없다. 그래서 피를 말리는 것 같기도 하다. 뼈를 깎는 고통과 치열한 고민을 거듭하며 촬영에 임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라미란에 맞게 각색한 ‘라미란 맞춤형’ 영화다. 기분이 어떤가.

“무슨 복을 타고났나 싶다. 늦은 나이에 시작해 주인공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그만큼 내가 독보적이라는 의미 아니겠나? 하하. 그렇게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할 것이다. 더욱이 여성 원톱의 코미디 영화는 드물다. 역사의 한 획을 그어보자, 싶었다. 하하. 여성 배우가 주체적인 주연을 연기하는 작품의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아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다작을 하는 배우다.

“난 언제나 ‘연기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자 ‘광대’라고 스스로를 생각한다. 그렇기에 다작 출연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누군가는 예술가형 배우와 생활형 배우를 구분하기도 하는데, 내가 뭐라고 ‘예술’을 한다고 말하겠는가. 일은 들어올 때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연기를 해서 먹고산다. 그래서 예술가가 아닌 연기자가 내 직업이다. 직업으로 먹고살지 못하면 그게 ‘꿈’이 되는 거다. 이루지 못할 꿈. 단역 시절에는 현장에 오래 있는 게 꿈이었는데 그 꿈을 이루게 돼서 기쁘다. 연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죽을 때까지 연기를 하고 싶다. 오래 버티는 게 목표다.”

 

라미란의 연기 비결은.

“대사는 다 외우지만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는 편은 아니다. 생각이 많아지면 연기를 못 한다. 현장은 늘 변한다. 그래서 내가 준비해 온 것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을 비우는 게 나름의 연기 비결이다.”

 

그녀를 만나고 온 기자들은 ‘미란매직’에 빠지기 일쑤다. 사이다 같은 멘트, 그 안에 녹아 있는 현실 내공. 이제 마흔여섯이 된 라미란은 지금 대체불가 배우가 됐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