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카메라에 멱살 잡혀 끌려간다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22 14:00
  • 호수 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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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체험'하게 만드는 샘 멘데스의 전술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프랑스 북부 서부전선. 영국군 병사 톰 블레이크(딘 찰스 채프먼)와 윌 스코필드(조지 매케이)에게 미션이 떨어진다. 독일군이 파놓은 미끼를 물기 일보 직전인 영국 데본셔 연대의 매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을 찾아가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라는 것. 모든 통신망이 차단된 상태이기에 소식을 전할 유일한 방법은 두 병사가 죽음을 각오하고 직접 가는 것뿐이다. 이들이 미션에 실패하면? 1600명에 달하는 영국군은 독일군의 함정에 빠져 몰살당한다. 전령사로 나선 두 병사의 하루를 따라가는 《1917》은 이야기만 놓고 보면 그리 특별할 게 없다. 그러나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방식에서 《1917》은 자기만의 색깔을 확보한다. 그 중심에 카메라가 있다.

전쟁에 ‘전술’이 필요하듯, 이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전쟁 영화에도 시네마적인 ‘전술’이 필요하다. 영화사에 이정표를 새긴 전쟁 영화 걸작들은 모두 전술의 특출함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곤 했다. 역시나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다. 오마하 상륙 장면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과감한 카메라 들고 찍기(핸드헬드)와 살점을 튀기며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가는 군인들의 처참함을 실제에 가깝게 담아내며 강렬한 대리 체험의 순간을 관객에게 선사했다. 전투 영화 클리셰를 일거에 뒤집어버린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이러한 기법은 이후 등장한 전쟁 영화들에 하나의 레퍼런스이자 교본이 됐다.

ⓒ㈜스마일이엔티
ⓒ㈜스마일이엔티

영화사에 남은 전쟁 영화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군 사상 최대인 19명의 전사자를 낸 소말리아 모가디슈 작전을 그린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2001)은 전쟁에 관한 살벌하고도 생생한 보고서였다. 오프닝 20분을 제외한 나머지를 극사실적인 전투 장면으로 빽빽이 채운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스크린 밖에서도 고통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전쟁의 잔인함을 일말의 동정 하나 없이 그려냄으로써 리들리 스콧은 전쟁의 실체를 까발렸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40만여 명의 영국군과 연합군을 구하기 위한 사상 최대의 탈출 작전을 그린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2017)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놀란은 이 사건을 세 가지 시간과 세 가지 공간, 즉 ‘육지에서의 1주일’ ‘바다에서의 1일’ ‘하늘에서의 1시간’으로 쪼개고 분해해 전쟁의 한가운데로 관객을 이송했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만나기 힘들 무공해 놀란표 전쟁 영화였다.

그렇다면 《1917》의 샘 멘데스는 어떤 전술을 선택했을까. 샘 멘데스는 두 병사가 상부의 호출을 받는 초반부터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기까지를 하나(혹은 두 개)의 장면처럼 보이도록 구현했다. 러닝 타임 전부가 롱테이크로 완벽하게 이어진 건 아니다. 알프리드 히치콕 감독이 《로프》(1948)에서 처음 시도했던 것으로, 따로 촬영한 컷들을 교묘하게 이어붙여 하나의 장면처럼 보이게 하는 ‘원 컨티뉴어스 숏’이 비결이다.

곳곳에 매복해 있는 장애물들을 힘겹게 밟아나가는 두 병사의 공포가 1인칭 시점과 포개져 불안을 내내 자극하기도 한다. 샘 멘데스는 흡사 솜씨 좋은 이탈리아 장인처럼 컷(cut)과 신(scene)들을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꿰어 관객을 전쟁에 동참케 한다. 컷을 이어붙이는 과정에서의 오차를 줄이기 위해 4개월간 배우들의 동선과 세트의 길이, 카메라의 움직임 등을 치밀하게 계산했다는데, 그 세밀함에 혀가 내둘러진다.

《1917》은 영화감독 이전에 연극 연출가로 명성을 날렸던 샘 멘데스의 이력을 확인케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목표지로 향하는 과정을 롱테이크로 잇겠다는 야심은 ‘시공간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샘 멘데스는 이를 연극적인 기법으로 풀어낸다. 연극에선 배우들이 보이지 않는 벽을 옮겨 다니며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곤 하는데, 《1917》도 몇몇 공간을 세트처럼 만들어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등장, 퇴장하고 공간(참호, 초원, 숲, 강물, 폐허가 된 마을 등)을 이동하게 한다.

촬영 전에 4개월의 리허설이 필요했던 이유가 수긍이 가는 부분이며, “연극 촬영하는 것과 같았다”는 스코필드 역의 조지 매케이의 증언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곳곳이 파괴돼 헐벗은 도시를 스코필드가 지나가는 장면에서 터지는 조명탄과 그로 인해 생기는 음영 또한 일견 연극적인 느낌을 안긴다.

샘 멘데스의 야심에 날개를 달아준 이는 현존하는 최고의 촬영감독 중 한 명인 로저 디킨스다. 《쇼생크 탈출》(199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등을 통해 무려 열세 번이나 오스카 촬영상 후보에 오르고 《블레이드 러너 2049》(2017)로 촬영상 트로피를 거머쥔 로저 디킨스는 샘 멘데스가 《1917》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극한의 상황을 완벽에 가깝게 구현해 낸다. 《1917》로 로저 디킨스는 2년 만에 다시 오스카 촬영상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결과다.

 

무엇을 위해 기술적 효과에 집착했나

카메라의 존재감을 쉴 새 없이 부각시키는 이러한 전략은 이야기의 흐름을 종종 삐딱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제기해야 할 중요한 질문. 샘 멘데스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기술적 효과에 집착했는가. 전쟁의 박진감을 위해?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기 위해? 볼거리의 현실에 그쳤다면 《1917》의 기술적 성취는 미학적으로나 메시지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가령 《인천상륙작전》(2016)과 같은 영화의 기술적 성취는 분명 나쁘지 않고 실감 나기도 하나, 그것이 극의 메시지나 미학에 복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어떤 영화들은 전쟁을 스펙터클로 소비하기도 한다.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영화마다 목표하는 바가 다르고, 그로 인한 태생적 차이는 있으므로.

앞서 말했듯, 《1917》은 관객이 전투를 밖에서 관찰하게 하는 게 아니라, 안에서 주인공들과 함께 체험하게 한다. 그리고 그 체험을 통해 전쟁의 공포와 허무함을 목도하게 한다. 더 나아가 이름 모를 누군가의 희생을, 그 희생이 살린 수많은 생명을 주목하게 한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샘 멘데스의 할아버지가 직접 겪고 들은 이야기가 《1917》의 출발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라고 누가 말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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