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사 체제 밖에서 그룹 지배하는 재벌 기업들
  • 송응철 기자 (sec@sisajournal.com)
  • 승인 2020.03.04 14:00
  • 호수 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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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림ㆍ애경ㆍ세아ㆍ한국테크놀로지그룹 등 2세 승계 핵심 역할 주목

최근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대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체제 밖에 머무르는 총수 일가 개인회사가 170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 내부거래를 통한 부의 대물림 창구로 이용되는 경우다. 특히 이들 계열사 중에는 지주사 지분을 보유한 회사도 9곳 있었다. 모두 편법 승계에 이미 동원됐거나, 향후 재원 창구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지목받는 회사들이다.

하림그룹의 올품이 대표적인 사례다. 올품은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의 장남 준영씨가 지분 100%를 보유한 가금류 저장·처리업체로 하림그룹 2세 승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림그룹 승계 작업은 2010년 본격화됐다. 당시 하림그룹은 계열사이던 한국썸벧(현 한국인베스트먼트)을 한국썸벧과 한국썸벧판매(현 올품)로 물적분할해 ‘한국썸벧판매→한국썸벧→제일홀딩스(현 하림지주)→하림홀딩스→주요 계열사’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김 회장은 2012년 한국썸벧판매 지분 100%를 준영씨에게 증여했다. 준영씨가 지배구조의 정점에 서게 된 것이다.

ⓒ하이트진로·시사저널 포토·뉴스뱅크이미지·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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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림, 100억원 세금으로 11조원대 그룹 지배

또 2013년에는 하림천하를 한국썸벧판매에 합병시키고 간판을 올품으로 바꿔 달았다. 여기에 2016년 제일홀딩스가 80%에 달하던 자사주 전량을 무상소각하면서 준영씨의 제일홀딩스 직간접 보유 지분율은 44.6%까지 급증했다. 2018년 상장 이후 올품의 지주사 지분율은 19.98%로 감소했지만 여전히 김 회장(22.64%)에 이은 2대 주주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림그룹은 현재 하림지주와 중간지주사인 하림홀딩스의 합병을 검토 중이다. 이를 통해 준영씨의 지배력은 더욱 단단해질 전망이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준영씨는 자산 총액 11조9000억원의 대기업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납부한 증여세는 100억원 수준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올품의 유상감자로 마련한 자금이 재원이었다. 개인자금은 한 푼도 들어가지 않은 셈이다. 이 때문에 하림그룹은 2017년 김상조 전 공정거래위원장 취임 이후 첫 조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올품 외에도 김 회장의 사실상 개인회사인 경우(80%)와 농업회사법인 익산(78.65%)도 하림지주의 주주 명부에 사명을 올리고 있다.

하이트진로그룹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생맥주 기자재 제조업체인 서영이앤티를 통해서다. 시작은 2007년 박문덕 하이트진로 회장의 장남 박태영 하이트진로 부사장(73%)과 차남 박재홍 서영이앤티 상무(27%)가 이 회사 지분 100%를 확보하면서부터다. 그 이듬해인 2008년 하이트진로는 지주사 체제 전환 작업을 벌였다. 이는 사실상 승계를 염두에 둔 작업으로 의심받았다.

이후 서영이앤티는 계열사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재원을 마련한 뒤 지분매각·주식스왑·유상증자·기업합병 등의 과정을 거쳐 지주사인 하이트진로홀딩스 지분 27.66%를 확보하면서 박 회장(29.49%)에 이은 2대 주주에 올랐다. 박태영·박재홍 형제가 서영이앤티를 통해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국세청은 2012년 이들 형제의 승계 과정을 문제 삼아 327억원의 증여세를 부과했다. 여기에 반발해 박태영·박재홍 형제는 국세청을 상대로 증여세를 취소해 달라는 취지의 소송을 제기했다. 2012년 1심에서는 패소했지만, 2016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하면서 형제는 증여세 부담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잡음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1월 검찰이 박 부사장과 하이트진로 임원진을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해 재판에 넘긴 것이다. 서영이앤티가 맥주캔 제조·유통 과정에 끼어들어 43억원의 ‘통행세’를 챙긴 혐의와 관련해서다. 박 부사장 등에 대한 수사는 2018년 공정위 조사에서 비롯됐다. 조사 결과 공정위는 하이트진로와 서영이앤티에 과징금을 부과하고 박 부사장 등을 검찰 고발했다.

세아그룹은 지주사 체제 밖 총수 일가의 개인회사가 두 곳 있다. 에이팩인베스터스와 HPP다. 세아그룹은 고(故) 이운영 세아그룹 회장의 장남 이태성 세아홀딩스 대표와 이순형 세아그룹 회장의 장남 이주성 세아제강 부사장이 각각 세아홀딩스와 세아제강지주 두 개 지주사를 중심으로 사촌경영을 하고 있다. 이 중 에이팩인베스터스는 이주성 부사장 등 특수관계인이 지분 100%를 보유한 회사다. 이주성 부사장(19.89%)에 이은 세아제강지주 2대 주주(19.43%)이기도 하다.

에이팩인베스터스의 전신은 이주성 부사장이 최대주주(53.33%)이던 세대에셋이다. 이 회사는 계열사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사세를 키운 뒤 2012년 주력 사업 부문을 해덕스틸에 넘긴 데 이어 2017년 해덕기업과 합병해 에이팩인베스터스가 탄생했다. 이를 통해 이 부사장은 해덕기업이 보유하던 세아제강지주 지분 19.36%를 확보하면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동시에 해덕기업이 보유하던 주력 계열사 세아제강의 지분 4.30%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반면, 세아홀딩스 지분 5.13%를 보유 중인 투자전문기업 HPP의 경우는 에이팩인베스터스와 달리 승계와는 무관해 보인다. 이태성 대표는 2013년 이운형 회장의 출장 중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세아홀딩스와 세아제강 지분을 상속받아 이미 최대주주에 올랐다. 이자를 포함해 1700억원에 달하는 상속세도 5년에 걸쳐 분할 납부를 마쳤다. 업계는 이 대표의 HPP 설립을 사업 확장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실제 HPP는 2015년 스테인리스 강관 제조사 씨티씨 인수를 시작으로 다방면에 걸친 투자를 하고 있다.

애경은 AKIS, 한국테크놀로지는 신양관광개발

애경그룹은 그룹의 모태이자 세제 제조업체였던 AKIS(옛 애경유지공업)가 지주사 체제 밖에 머물며 지주사인 AK홀딩스에 대한 지배력(10.37%)을 행사하고 있다. 이 회사는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5.63%)과 그의 장남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50.33%), 차남 채동석 애경산업 부회장(20.66%), 삼남 채승석 전 애경개발 대표(10.15%), 장녀 채은정 애경산업 부사장(13.23%) 등 오너 일가의 지분율이 100%다. AKIS 역시 매년 매출의 상당 부분을 내부거래로 채우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 밖에 한국테크놀로지그룹(옛 한국타이어그룹)의 건물 유지·보수업체인 신양관광개발도 지주사 지분을 보유한 오너 일가 회사다. 조양래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회장의 장남 조현식 한국테크놀로지그룹 부회장(44.12%)과 차남 조현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사장(32.65%), 두 딸인 희원·희경씨가 지분 100%를 보유 중이다. 이 회사는 그룹 계열사들의 건물 유지·보수업무 등을 도맡아 왔으며, 이를 통해 얻은 수익을 주식 등에 투자해 추가 수익을 올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신양관광개발이 보유한 지주사 한국테크놀로지그룹(주) 지분율은 0.03%로 미미한 수준이다. 주력 계열사인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지분율도 0.64%로 주목할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신양관광개발이 향후 현식·현범 형제가 한국테크놀로지그룹(주) 최대주주(23.59%)인 조 회장의 지분을 넘겨받을 때 승계 재원 창구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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