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떠올리게 한 튀링겐주 총리 선거에 독일 ‘발칵’
  • 이수민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05 08:00
  • 호수 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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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당 도움받아 당선된 것은 ‘오점’” 비판 쇄도에 당선자 하루 만에 사퇴

2월5일, 독일 언론들은 일제히 튀링겐(Thuringen)주의 수도인 에어푸르트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난 10월말 치른 주의회 선거에 이어 주의회가 뽑는 주 총리(주의 총리, 독일은 연방 전체의 총리와 별도로 각 주마다 총리가 있음)가 누가 될지에 관심이 쏠렸다. 여러 예측들이 나왔지만, 좌파당(Die Linke) 소속의 보도 라멜로브의 총리직이 유지될 것이란 의견이 가장 우세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결과는 놀라웠다. 자유민주당(FDP·이하 자민당) 소속의 토마스 켐머리히(Thomas Kemmerich) 후보가 주 총리로 뽑힌 것이다. 켐머리히는 같은 날 오후 1시28분 공식적으로 총리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정치권 내부에서 거센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독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지지를 받고 주 총리로 당선된 토마스 켐머리히가 2월6일 사퇴했다. ⓒ연합뉴스
독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지지를 받고 주 총리로 당선된 토마스 켐머리히가 2월6일 사퇴했다. ⓒ연합뉴스

“기민당이 극우 정당의 조력자 역할 했다”

비판은 당일 오후 4시경 켐머리히와 같은 당인 자민당 대표 크리스티안 린드너(Christian Lindner)가 선거 결과에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는 발언으로 시작됐다. 여기에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머물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역시 선거 결과를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 비판하며 재선거를 요청했다. 급기야 독일 시민들이 대거 거리로 나와 선거 결과에 분노하며 데모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한 주의 총리를 뽑는 이 선거 결과가 왜 이토록 독일 사회 전역에 파장을 낳고 있는 걸까.

튀링겐주 의회는 총 90석으로 그중 좌파당이 29석, 독일대안당(AfD·이하 대안당)이 22석, 기민당이 21석, 사회민주당(SPD·이하 사민당)이 8석, 그리고 녹색당과 자민당이 각각 5석을 차지하고 있다. 선거 전날인 2월4일 좌파당과 사민당, 녹색당이 연정협약을 체결함으로써 라멜로브는 42표를 확보하게 됐다. 문제는 총리로 취임하기 위해서는 1, 2차 투표에서 과반 이상의 표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었고, 그 점에서 라멜로브가 3표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의석수 3위를 차지하는 기민당의 도움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노선이 너무나 상이하다는 이유로 좌파당과 거리를 두고 있는 중도우파 성향의 기민당의 행보는 깜깜이였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라멜로브의 승리를 예측하는 쪽에서는 평소 그의 비교적 중도적인 행보를 언급하며, 기민당에서 부족한 표를 채울 것이라는 기대를 했을 뿐이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이루어진 투표는 총 3차까지 가서야 결과를 낼 수 있었다. 1, 2차 투표에서는 한 후보가 과반, 즉 46표 이상을 얻어야 하지만 3차부터는 과반이 아니어도 더 많은 표를 얻기만 하면 당선된다. 1, 2차 투표 때는 라멜로브와 대안당에서 내세운 크리스토브 킨더파터가 경합을 벌였다. 그러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3차 투표가 시작되자 자민당에서 새 후보를 내세웠다. 각 정당에서는 1차, 2차, 3차 투표 때마다 각각 후보를 올릴 수 있다. 즉 1, 2차 투표에 나오지 않은 후보여도 3차 투표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자민당의 켐머리히 후보였다. 결과는 라멜로브 44표, 킨더파터 0표, 켐머리히 45표, 기권 1표로 켐머리히의 승리였다.

의석수 5개, 즉 전체의 5.5%에 불과한 자민당 소속이자 3차 투표 때에야 나온 켐머리히의 승리가 어떻게 가능한지는 의석수와 투표 결과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자신들의 후보가 아닌 켐머리히에 몰표를 던진 대안당 때문이었다. 대안당은 독일 극우파로 분류되는 정당으로, 2013년 창설된 신생 세력이지만 최근 무섭게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이들은 사민당과 더불어 독일의 모든 주에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정당이 됐다. 2019년 11월 기준으로, 1위인 기민당은 바이에른을 제외한 15개 주에서 총 494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최근 좋지 않은 성적을 내고 있는 사민당 역시 독일의 16개 모든 주에서 472석을 차지해 2위를 지키고 있다. 대안당은 16개 주에서 256석을 차지함으로써 기존의 녹색당이나 좌파당보다 나은 성적을 냈다.

이러한 대안당의 기세는 정당의 극우 정책 때문에 독일인들에게 더욱 큰 걱정거리다. 연정이 자주 이뤄지는 독일 정치판에서 모든 정당들이 대안당과는 연정이나 협력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거리를 두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대안당의 표에 힘입어 극소수당인 자민당 후보가 주 총리 자리에 올랐다는 점이 많은 이들을 경악하게 한 것이다. 녹색당 의원 마들렌 헨플링은 선거 직후 “믿을 수 없는 결과다. 자민당은 파시스트들에 의해 관직에 오르고 기민당은 기꺼이 조력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며 결과를 비판했다.

반면 대안당에서는 자신들이 킹메이커라며 연일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있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같은 날 오후부터 에어푸르트 주의회 앞에선 시민들이 반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저녁엔 1000명에 가까운 인파가 모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에어푸르트뿐 아니라 베를린, 예나 등 다른 도시에서도 결과에 분노한 시민들의 데모가 이어졌다. 반대로, 부정선거도 아닌 ‘정정당당하게’ 당선된 후보가 왜 사퇴해야 하느냐는 의견도 나왔다. 이러한 혼란에 켐머리히는 당선 후 첫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대안당에 반대하고 투표 이전에 대안당과 그 어떤 교류도 없었다며 대안당과의 거리를 뚜렷하게 밝혔다.

하지만 이 선거 결과에 대한 반대 여론은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메르켈 총리의 후계자로 꼽혀온 카렌바우어 기독민주당 대표(위)가 이번 사태로 지도력에 손상을 입었다. ⓒ연합뉴스
메르켈 총리의 후계자로 꼽혀온 카렌바우어 기독민주당 대표(위)가 이번 사태로 지도력에 손상을 입었다. ⓒ연합뉴스

90년 전 히틀러를 다시 소환한 튀링겐 선거

기자회견 다음 날인 2월6일 오전 자민당 대표 린드너는 에어푸르트로 가서 켐머리히와 대화를 했다. 린드너는 켐머리히가 사퇴하지 않으면 자신이 사퇴하겠다고 말하며 당시까지만 해도 긍정적으로 총리직을 수행하려던 켐머리히를 설득했다. 결국 그날 오후, 당선 하루 만에 켐머리히는 사퇴했다. 그는 “대안당의 도움을 받아 주 총리직에 올랐다는 오점을 지워야 하므로 사퇴가 불가피했다”고 발표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승리는 튀링겐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우리는 오늘 진짜 결정적인 정당이 되었다. 지금까지 튀링겐 정부를 구성한 정당들은 이제 우리의 협력 없이는 다수당이 될 수 없다.” 90년 전인 1930년 2월, 독일 히틀러가 한 말이다. 당시 그가 정치적 실험의 장으로 여기며 나치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던 곳이 바로 튀링겐이었다. 실제 히틀러가 언급한 이 ‘승리’는 나치당이 튀링겐주 의회 선거에서 기존에 얻었던 표의 3배를 얻어 11%를 넘겼고, 그래서 당시 좌파당의 집권을 막으려던 우파당이 나치당과 협력할 수밖에 없던 사실을 일컫는다.

이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번 선거 사태에 대해 많은 독일 국민은 걱정을 내비치고 있다.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더라도 이번 선거 결과는 극우 세력에 설 자리를 마련해 주고, 역사적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극우파가 집권당이 되는 오늘날, 독일 또한 과거의 나치 망령에 다시금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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