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강제된 격리 일상 조금 덜 불행하게
  • 송혜진 숙명여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11 18:00
  • 호수 1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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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기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를 ‘격리’ 상황이다. 국가는 우리에게 ‘사회적 거리 두기’를 제안하고 있다. 모두를 위한 최선의 조치라고 한다. 걱정과 분노의 말들, 불확실한 예측과 거짓말이 여기저기서 넘쳐난다. 이런 말에 귀 기울이거나 여기저기 퍼 나르는 일은 공포와 불안의 온도를 높이는 일일 뿐. 이럴 때일수록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에 귀 기울인다. 이럴 때는 ‘무슨 일이든 맘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큰 힘이 된다.

유배지에서 긴 세월을 보냈던 몇몇 분들을 떠올려본다. 그중에 이학규(李學奎·1770~1835)라는 분이 있다. 이분은 1801년 신해사옥 때, 한창 일할 나이인 32세에 경상도 김해로 유배돼 장장 24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한 걸음도 나올 수 없었다. 뒤를 봐줄 집안 배경도, 경제력도 없었기에 유배지의 일상은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아내와 어머니, 어린 두 자식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고, 유배지에서 정 붙이고 살던 현지 부인이 딸을 낳은 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나는 아픔도 겪었다. 이때 지은 글들을 읽다 보면 구구절절 어찌나 애절한지 곳곳에 눈물 지뢰가 묻혀 있는 듯하다.

이런 유배 생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젠가는~’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이학규는 더 나쁜 상황을 상상했다. 추위가 극심한 때는 눈 내리는 밤에 눈물 흘리면서 애원하며 구걸하는 가난한 집 아이를, 더울 때는 한여름 땡볕 아래서 땀 뻘뻘 흘리며 일하는 머슴들을, 마음속에 번민이 쌓일 때는 순장 당하는 이가 죽음에 직면한 상황을, 근심스러울 때는 형장의 사형수를 떠올렸다. 어려움 속에서도 스스로 견딜 수 있는 힘을 내보려는 노력의 한 방법이었다.

유배지의 또 다른 시간을 들여다본다. 이신의(李愼儀·1551~1627)는 광해군 때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됐다. 68세 늙은 나이였다. 멀고도 먼 북방의 험지에서 낮이 밤같이 어둡고 쓸쓸하며, 거북이처럼 움츠려 있던 그는 어느날 ‘거문고’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을 하면 좀 숨통이 트일 것 같아서였다.

유배지의 죄인이 악기를 구한다는 소문이 밖으로 새면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지만, 이신의는 고을 수령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냈다. 품질 여하를 막론하고 소문나지 않게 한 대만 구해 주신다면 살 것 같다는 간절한 내용이었다. 마침내 거문고를 받아든 이신의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인조반정이 일어나 무사히 풀려났다.

2월24일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국회의사당과 의원회관에 대한 전면 방역을 실시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2월24일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국회의사당과 의원회관에 대한 전면 방역을 실시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다면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 국면, 예기치 않게 맞닥뜨린 ‘사회적 거리 두기’의 이 시간을 보통 사람 우리들은 어찌 보내야 할까. 무슨 일이든 양면이 있는 법이니 각기 주어진 상황에서 스스로 조금이라도 덜 불행해지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돌아볼 틈 없이 반복되던 일상을 점검하며 불필요한 관계와 사물들을 덜어내고, 주변과의 소통 방법을 점검하고, 말을 줄이고, 홀로 있는 시간의 충만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평소에  ‘아무 일 하지 않고 한 열흘쯤~’ 이런 얘기를 자주 입에 올렸다면 비록 모두가 힘들고, 원하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당면한 ‘사회적 격리’ 기간을 나름대로 잘 보내볼 일이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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