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열풍] 대한민국 뒤흔든 트로트 열풍에 숨은 네 가지 코드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15 10:00
  • 호수 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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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노소 모두 즐긴다…트로트 프로그램 ‘시청률 대박’

바야흐로 트로트의 시대다.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이하 《미스터트롯》)이 국민 예능으로 승승장구하고 있고, MBN의 《트로트퀸》도 6~7%의 시청률을 올렸다. MBC에브리원은 《나는 트로트 가수다》를 편성했다. SBS에선 《트롯신이 떴다》가 시작됐다. 요즘엔 예능 시청률이 10%만 넘어도 대박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출연진이 제작발표회에서 10% 공약을 내걸었다. 그런데 《트롯신이 떴다》의 1회 시청률은 14.9%(2부)나 나왔다.

트렌드를 반영하는 일반 예능에서도 트로트 가수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흔히 트로트를 ‘역귀성’ 장르라고 한다. 방송에서 잘 소개하지 않기 때문에, 지방을 돌며 저인망식으로 홍보해 바람을 일으킨 끝에 중앙 무대에 입성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요즘은 방송에 트로트가 나온다.

트로트는 음악 지망생들에게 뭔가 떳떳하지 못한, 당당하지 않은 장르라는 인식이 있었다. 젊은 세대도 트로트를 기피했다. 2007년 작 영화 《복면달호》에선 주인공 달호가 트로트 가수로 나서게 된 처지를 부끄럽게 여겨 가면을 썼다. 그랬던 트로트가 이젠 양지로 나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젊은 트로트 스타가 선망의 대상이 됐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MBC 제공
ⓒMBC 제공

《미스트롯》이 끌고 ‘유산슬’이 밀었다

변화의 출발은 2019년 2월에 시작된 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이하 《미스트롯》)이었다. 처음엔 중·노년층 대상의 종편 마이너 프로그램 정도로 인식됐다. 여성들이 미스코리아 느낌으로 나와 성적 어필을 하기도 해서 구시대적 쇼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하지만 ‘송가인이어라~’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송가인은 가창력과 소탈한 인간미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오랜만에 나타난 정통 트로트 음색에 그동안 고생했던 무명 시절 스토리까지 겹쳐 폭발적인 팬덤이 나타났다. 펭수와 더불어 2019년 최고의 스타였다.

연이어 홍자, 정미애 같은 스타들이 계속 발굴되고 최고의 무대가 이어지면서 열광이 커져갔다. 급기야 시청률 18.1%라는 숫자가 터져 나왔다. 당시 종편 예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치였다. 때마침 돌아온 나훈아의 콘서트도 화제가 되면서 트로트가 핫한 장르로 부상했다.

가온차트 2019년 20주 차(5월12~18일) BGM 차트에서 송가인 노래 두 곡과 홍자, 장윤정, 홍진영의 노래까지 트로트 5곡이 ‘톱10’에 올랐다. BGM 차트는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 배경음악의 순위로 인터넷 트렌드를 보여준다. 2018년 같은 기간엔 톱10에 트로트 노래가 단 한 곡도 없었다. 트로트 콘서트 관객이 2018년 상반기에 2만8800명이었는데, 《미스트롯》이 방영된 2019년 상반기엔 6만3000명으로 늘었다(인터파크). 송가인이 주요 예능을 휩쓸다시피 하면서 트로트를 보는 젊은 세대의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젊은 세대를 변화시킨 사건은 MBC 《놀면 뭐하니?》의 ‘뽕포유’ 특집이었다. 유재석이 ‘유산슬’이라는 이름으로 트로트 신인 가수에 도전한 것이다. 국민MC 유재석이 나서자 SNS에 뜨거운 반향이 나타나며 트로트가 순식간에 친밀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일이 되려면 정말 우주의 기운이 모이는 것인지, 단지 음악 때문에 섭외한 작곡가와 편곡자가 절정의 개그 콤비가 되어 인기를 견인했다. 흥이 난 김이나 작사가가 예정에 없던 추가 작사도 하는 바람에 두 번째 곡 《사랑의 재개발》까지 탄생했다.

가창력이 부족한 유재석에게 맞추다 보니 《합정역 5번 출구》와 《사랑의 재개발》이 모두 쉽고 발랄한 노래로 만들어져 대중적인 붐을 일으키는 데 적절했다. 특히 젊은 층이 흥겹게 동참할 수 있었다. ‘뽕포유’의 파장이 커지면서 트로트 대중화도 가속화됐다. 여기에 김연자, 진성, 홍진영, 요요미 등 트로트 가수가 대거 등장해 젊은 시청자에게 기성 트로트 가수들을 재발견시켰다. 트로트 공연에 열광하는 것이 창피한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생겼다.

 

시청률 30% 《미스터트롯》이라는 결정타

트로트 열풍의 결정타는 단연 《미스터트롯》이다. 1월2일 첫 방송 시청률이 12.5%가 나왔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수치다. 5회 만에 기존 종편 최고 시청률인 JTBC 드라마 《SKY 캐슬》의 22.5%를 넘어 25.7%를 기록했다. 예능이 드라마 시청률을 뛰어넘는 건 희귀한 ‘사태’다. 8회에 꿈의 수치인 30%를 달성하고, 10회에 33.8%까지 치솟았다.

2000년 이후 30% 고지에 올랐던 예능은 《개그콘서트》 《1박2일 시즌1》 《무한도전》 등 단 세 편이었다. 그때에 비해 TV 시청률이 하락했기 때문에 현재의 30%는 더 놀랍다. 역대 오디션 최고 시청률 기록은 2011년 MBC 《위대한 탄생》 시즌1의 22.8%였는데 이 기록도 깼다. 3월2일 기준으로 TV 비드라마 부문 화제성 9주 연속 1위를 달성했다. 점유율이 23.55%인데, 2위인 《슈가맨3》는 5.99%, 3위인 《나 혼자 산다》는 2.79%였다. 비드라마 출연자 화제성 부문에선 1위부터 4위까지 ‘줄 세우기’ 하는 등 톱10 안에 《미스터트롯》 출연자 6명이 들어갔다. 유재석은 10위였다.

글로벌빅데이터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미스터트롯》의 온라인 관심도는 《미스트롯》에 비해 3.5배 증가했다. 《미스터트롯》 서울 콘서트 표가 10분 만에 매진됐는데, 20대 비율이 43.3%였다. 《미스트롯》 서울 콘서트 당시엔 20대가 23.4%였다. 20대가 부모 심부름으로 예매하는 경우도 많지만 《미스트롯》 때보다 《미스터트롯》 공연에 20대 비중이 두 배 정도 뛴 건 심부름만으론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젊은 세대의 실수요가 늘었다고 판단된다. 이렇게 《미스터트롯》이 전 연령대에서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트로트가 트렌드의 핵이 됐다.

최근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트로트 열풍의 원인은 크게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한국인 특유의 문화적 DNA와 시대 상황에 맞는 트로트의 변신, 새로운 스타 탄생에 따른 신선함, 덕질하는 중장년층의 등장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진 결과로 풀이된다. 이로 인해 트로트는 이제 더 이상 중장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젊은 층도 즐겨 듣는 음악 장르가 됐다.

《미스터트롯》 ⓒTV조선
《미스터트롯》 ⓒTV조선

■ 한국인의 문화적 DNA

트로트는 한국인의 문화적 DNA의 일종이다. ‘젝스키스’ 리더 은지원은 “트로트는 제가 듣지 않고 자란 장르라 언젠가 없어질 거란 생각을 무턱대고 했다. CD나 테이프처럼. 그런데 멜로디도 좋아 찾게 되니까 쳇바퀴처럼 (유행이) 돌고 도는 것 같다. 그 감성은 평생 영원할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영원히 이어질 감성’. 이는 문화적 DNA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침체기는 있어도 사라지진 않는다. 잠시 소외됐다가도 어느 시점이 되면 바로 부흥한다. 한동안 침체됐던 트로트가 부흥할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미스트롯》이 찾아왔다.

트로트는 일본 것이지 전통 가요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트로트가 식민지 시절 일본에서 건너온 것은 맞아 보인다. 서구 문화를 먼저 받아들인 일본이 서구 음악을 일본식 5음계로 바꿔 동양화한 것이 한국으로 넘어왔다. 한국에서 민요풍과 결합해 토착화한 것이 트로트다. 그러니까 순수한 서양음악보다 트로트가 더 동양적이며, 한국적이다.

2000년대 이후 힙합 같은 서구식 음악이 범람했는데, 그런 음악만으론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있다. 그래서 때가 되면 트로트의 기세가 강해진다. 1960년대에도 《노란 샤쓰의 사나이》(한명숙)를 필두로 미국식 음악의 공습이 있었다. 패티김은 서구적 관능미로 이목을 사로잡았다. ‘뽕짝’에는 저질이란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이미자가 등장해 구슬픈 정조로 트로트의 부활을 이끌었다. 1985년에 코리안데일리가 ‘한국을 만드는 100명의 인사’를 꼽았는데 연예인으론 유일하게 이미자가 포함됐다. ‘한국 정신을 대표하는 목소리’라고 했다.

문화적 DNA는 경험을 통해 전승된다. 청년기에 트로트를 경멸하며 팝송을 찾았던 사람이라도 어렸을 때 공기처럼 주변을 감쌌던 트로트를 기억한다. 그것이 결국 친밀함으로, 그리움으로, 엄마 품처럼 다가온다. 댄스음악도 ‘뽕끼’가 있어야 성공한다고 했을 정도로 트로트적 감성은 우리에게 깊이 각인됐다.

문화의 유래를 따지는 건 부질없다.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으면 우리 것이다. 트로트는 1960년대 전까진 ‘유행가’라고 불렸다. 노래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식민지 시절의 설움, 한국전쟁의 고난, 산업개발 시대의 애환을 달래준 것이 트로트다. 우리의 현대사와 함께해 온 우리 문화인 것이다.

불황이다. 좌절이 일상적 풍경이다. ‘울분사회’라는 말도 나왔다. 이런 때일수록 이성적 사고 작용을 거치지 않는 원초적 위로, 원초적 흥을 찾는다.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오며 한(恨)도, 흥도 우리 식으로 풀어내는 트로트가 바로 그런 원초적 에너지였다.

 

■ 트로트의 시대별 변신

트로트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음색, 분위기, 범위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생명력을 이어간다. 식민지 시절 형성됐던 고전적인 트로트는 1970년대에 한국적인 ‘꺾기’ 창법으로 변화했다. 청년문화 록밴드가 도전하자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같은 ‘트로트 고고(록과 트로트의 결합)’로 응전했다. 80년대 경제적 풍요로 구슬픈 정조의 시효가 다하자 주현미가 등장해 ‘관광버스 춤’과 함께 장조 트로트를 이끌었다. 이 시대에 ‘꺾기’는 경쾌하고 간드러진 청각적 쾌락이 됐고 현철이 ‘꺾기 끝판왕’으로 나섰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90년대 댄스음악 혁명이 터지자 트로트는 2000년대에 장윤정, 박현빈의 ‘뉴트로트’로 응전했다. 한때 트로트의 대척점이었던 《노란 샤쓰의 사나이》까지 이제는 트로트로 흡수됐을 정도로 트로트는 확산력이 크다. 《미스터트롯》에서도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와 같은 포크, 《젊은 그대》와 같은 록음악 등 다양한 장르가 트로트의 지평을 넓혔다. 봉춤, 태권도, 마술, 비트박스, 삼바춤, 아이돌 퍼포먼스 등 다양한 요소들을 결합시키기도 했다. 최근에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처럼 EDM과 트로트를 결합한 사례도 있다. 이러한 변신과 확산으로 젊은 층까지 잡아낸 것이다. 이것이 마침 맹위를 떨치던 ‘뉴트로’라는 복고 트렌드와 맞물렸다.

 

■ 새로운 스타 탄생이 준 신선함

새로운 스타들이 잇따라 탄생해 트로트에 활력을 불어넣고, 드라마틱한 스타덤 스토리가 국민의 시선을 끌었다. 특히 임영웅(29), 김호중(29), 신인선(29), 이찬원(25)과 같은 젊은 스타들이 젊은 팬덤을 이끌었다. 홍잠언(9), 정동원(13) 같은 어린 샛별은 전 연령대에 어필했다. 새롭고 젊은 스타들로 인해 트로트에 신선하다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또 이 스타들이 펼치는 최고 수준의 무대가 트로트를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트로트에 대한 열광이 부끄럽지 않게 됐다.

 

■ ‘덕질’하는 중장년층의 등장

열정적인 팬덤 문화는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젠 아니다. 중장년층에서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팬질’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유튜브로 영상을 몰아서 시청하고, 영상을 새롭게 편집해 올리기도 하고, SNS로 ‘짤’을 공유하며 홍보하고, 공연장에서 열광하는 팬덤 활동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이런 현상은 경제적 풍요, 늘어난 수명으로 중년 이상 세대에게 문화적 욕구가 거세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고 욕구를 내리누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이젠 자신의 행복을 찾는, 즉 ‘자기 배려’를 추구한다. ‘나를 위한 소비’에도 열심이다. 영화계에선 중년층을 잡아야 빅히트가 터진다는 말이 있다. 음악계에서도 중년층의 취향이 트렌드를 이끈 것이다.

경험이 문화적 DNA가 이어지는 통로다. 요즘 젊은 세대는 미국식 음악을 주로 들으며 트로트와 단절됐었다. 하지만 최근 트로트 신드롬으로 이 세대에게 트로트 DNA가 이식되고 있다. 트로트의 수명이 늘어난 것이다. 앞으로도 트로트는 시대에 맞춰 변화하며 우리네 삶과 고락을 함께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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