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기 열풍 일본은 ‘화장지 대란’
  • 류애림 일본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13 14:30
  • 호수 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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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 “마스크 이어 화장지 동난다” 유언비어 확산…정부 해명에도 불신 깊어

3월11일 도쿄의 한 슈퍼마켓은 상품 진열대가 텅 비어 있다. 대신 ‘티슈, 두루마리 화장지, 키친타올 한 가족당 각 한 개까지’라는 안내문구가 붙어 있다. 다른 슈퍼와 약국도 마찬가지다. 여성 생리용품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일본 SNS에서 마스크 다음으로 구하기 힘들어질 물건은 종이로 만드는 두루마리 화장지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 후 도쿄 시내 슈퍼의 두루마리 화장지와 티슈는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 화장지를 손에 넣기 위한 기다란 줄까지 생긴 슈퍼도 있다.

“중국에서 수입이 안 된다” “마스크 원료와 같다”는 이유로 곧 화장지를 구하기 어려워진다는 소문이 일본에 확산하기 시작했다. 물론 근거 없는 ‘데마’다. 일본에서는 유언비어를 ‘데마’라고 한다. 독일어 데마고기(demagogie)를 줄인 말로, 원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소문을 뜻한다. 그러나 현재는 단순한 루머, 유언비어를 뜻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이번 일본의 화장지 부족 사태 역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불러온 ‘데마’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3월4일 일본 도쿄의 슈퍼마켓에서 한 직원이 사재기로 텅 빈 화장지 진열대 근처에서 일하고 있다. ⓒ REUTERS
3월4일 일본 도쿄의 슈퍼마켓에서 한 직원이 사재기로 텅 빈 화장지 진열대 근처에서 일하고 있다. ⓒ REUTERS

‘화장지 데마’를 불러온 두 가지 이유

일본에서 화장지 사재기가 일어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때도 화장지 사재기 열풍이 있었다. 가와사키(川崎)시에 사는 주부 A씨는 당시 기억이 선명하다. A씨는 “원유 가격이 급등해 종이 생산이 적어지는 게 아닌지 걱정한 사람들이 가게에 몰려 많은 양의 화장지를 샀다. 그때도 가게에서 두루마리 화장지가 종적을 감췄다”고 회상했다. ‘두루마리 화장지 소동’이라고도 부르는 이 사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통상산업대신(현 경제산업대신)이 종이 제품을 절약해 달라고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종이가 없어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모두가 화장지를 사서 쌓아두기 시작했다. 방 하나를 모두 화장지로 채웠다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론 일본의 종이 생산은 안정적이었고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한 후에는 생산량이 더 증가했다. 근거 없는 ‘데마’였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일본에서 또다시 화장지 사재기가 재연된 건 코로나19 탓이다. 코로나19가 대유행 양상으로 진행하면서, 일본 곳곳에서 마스크는 물론 화장지까지 사재기 대란이 벌어지고 있다. 마스크 원재료가 화장지에 쓰이고, 이 때문에 중국에서 수입이 끊겨 살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SNS에 확산하고 있어서다. 일단 일본 정부는 근거 없는 낭설이라는 입장이다. 일본가정종이공업회에 의하면 현재 일본에서 유통되는 두루마리 화장지의 98%가 일본 내에서 생산된다. 재고도 충분하고 원료 조달이나 생산능력에도 문제가 없다는 게 일본 정부의 주장이다. 일본 국민의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창고에 잔뜩 쌓여 있는 화장지 재고를 공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동네 슈퍼 진열대에서 화장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서두르는 수밖에 없다.

일본 사회에서 유언비가가 급속히 확산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진 후 일본 정부와 신문, 방송이 일본 국민의 신뢰를 잃은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소문에 날개를 달아 퍼뜨리는 SNS가 등장해 1973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석유파동 때는 결국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정보를 얻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처럼 긴 줄을 서지 않아도 결국 괜찮았다”고 회상하는 A씨. 하지만 지금은 SNS가 발달하면서 유언비어도 끝을 모르고 퍼지며 소문의 주인공인 물건을 사려는 행렬은 더욱 길어지고 있다.

마스크 역시 품귀현상을 빛고 있다. 지바에 사는 회사원 B씨는 아침 일찍 생활용품점에 줄을 섰다. 몇 번이고 실패한 끝에 어린이용 마스크를 손에 넣었다. 본인은 쓰지 못하겠지만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아들이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일본은 곧 화분증, 꽃가루 알레르기의 계절이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이즈음이면 많은 일본인들이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마스크를 하고 다닌다. 하지만 판매점들에는 ‘마스크 없음’이라는 안내문이 마스크 대신 진열대에 붙어 있다. 인터넷 쇼핑몰 사정도 마찬가지다. 도쿄의 한 대학원에서 유학 중인 C씨는 틈만 나면 아마존 재팬 사이트에 접속해 마스크 구입을 시도한다. 한번은 60장에 1628엔(약 1만8500원) 하는 제품을 발견했지만 클릭하는 사이에 매진돼 버렸다. 또 개인이 판매하는 값싼 마스크가 있어 상세정보를 열람해 보니 제품 자체의 가격은 쌌지만 배송비가 무려 2만 엔(약 22만5000원)이었다.

 

통조림·쌀 사재기 조짐도

마스크, 화장지 등의 사재기와 되팔기가 심각해지자 일본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했다. 지난 2월28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3월14일부터 대형 인터넷 쇼핑 사이트와 옥션 사이트 등에 마스크 출품을 ‘자숙’해 달라고 요청했다. 3월5일에는 ‘국민생활안정긴급조치법’을 개정해 마스크의 부당한 되팔기를 금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0일 각의결정했다. 15일부터 전매 금지가 시행되고 이를 위반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만 엔(약 1128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물론 구입 가격과 같은 가격으로, 또는 더 싸게 되파는 경우는 대상이 아니다. ‘국민생활안정긴급조치법’은 1973년 석유파동 이후 탄생했는데, 당시 화장지 사재기 등을 경험한 일본 정부가 경제에 이상이 발생했을 때 대응하기 위해 만들었다. 국민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거나 국민 경제활동에 중요한 물자의 가격과 수요에 관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법이다.

중앙정부의 조치와는 별도로 지방자치단체들도 움직이고 있다. 교토의 구미야마(久御山)에서는 재해대책으로 비축해 두었던 약 5만3000장의 마스크 중 약 2만5000장을 고령자와 임산부에게 우편으로 배포하기로 결정했다. 일회용 마스크를 1인당 5장씩 나눠준다. 사이타마(埼玉)시의 경우 3월9일부터 마스크 9만3000장을 방과후 아동클럽이나 보육소 등 공립, 민간 시설에 직원용으로 배부하고 있다. 3월 중순에는 고령자 시설까지 대상을 넓혀 18만 장을 배부할 예정이다.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일본 사회 내에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석유파동 때는 화장지뿐만 아니라 세제, 설탕까지 사재기의 대상이 됐다. 지금도 재고가 충분하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화장지 사재기는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또 27년 전처럼 통조림·쌀 등의 사재기로까지 이어질 낌새까지 보이고 있다. 무너진 일본 정부의 신뢰를 연료로 근거 없는 말들이 날아다니며 혼란만 커지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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