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 사면받고 2000억원 기부 약속한 건설사들, 5년간 106억원 밖에 안냈다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0.03.18 14:00
  • 호수 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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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벗을 각오로 약속 지키겠다”더니…3번이나 사면받고도 담합 카르텔 여전

“이번까지 3번이나 큰 사면을 받았다. 앞으로 담합이 재발하지 않도록 CEO들이 옷 벗을 각오로 자정을 결의했다.”

주요 건설사 72곳의 대표들은 2015년 8월19일 서울 논현동 건설회관에서 ‘건설업계 자정결의 및 사회공헌사업 선포식’을 가졌다. 당시 건설업계는 담합 등의 비리로 공공사업의 입찰이 제한된 상태였다. 정부는 8월15일 입찰 담합 건설업체 74곳에 대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심지어 사면일 이후에도 담합 사실을 자진신고하면 면죄부를 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국내 72개 건설사 대표는 2015년 8월 담합 재발 방지를 결의하며 2000억원 기금 출연을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고 있다. ⓒ뉴시스
국내 72개 건설사 대표는 2015년 8월 담합 재발 방지를 결의하며 2000억원 기금 출연을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고 있다. ⓒ뉴시스

11조원대 공사 수주하고도 기부 약속 안 지켜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계속된 건설업계 특사로 대기업의 입찰 담합 카르텔을 고착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사면법상 특별사면은 이미 선고된 형의 집행을 면제하는 것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범죄까지 처벌을 면제해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시민단체들은 지적했다.

그러자 주요 건설사 CEO들이 서울 건설회관에 모였다. 이들은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사과했다. 아울러 재발 방지와 함께 연내에 2000억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해 사회공헌활동에 나서겠다고 밝힌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공공사업 입찰 참가 제한이 풀리고 한 달여 만에 또다시 담합이 적발됐다. 공정위는 그해 10월4일 서해선 복선전철 제5공구 건설공사의 입찰에서 ‘뽑기 방식’으로 공사금액을 정한 대림산업과 현대산업개발(현 HDC현대산업개발), 현대건설, SK건설 등 4개 업체에 28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듬해 4월에는 3조2000억원대 액화천연가스(LNG) 저장탱크 건설공사 담합 사실이 드러나며 13개 건설사가 351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역대 두 번째로 큰 과징금 규모였다.

삼성물산이 가장 많은 액수인 732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뒤이어 대우건설(692억원), 현대건설(620억원), 대림산업(368억원), GS건설(325억원), 포스코건설(226억원), 한양(212억원), 두산중공업(177억원), SK건설(110억원), 한화건설(53억원) 순이었다. 비슷한 시기 현대건설과 두산중공업, 한진중공업, KCC건설 등은 원주-강릉 고속철도 건설사업의 입찰 담합 비리 혐의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최근 5년간 담합 사건 조치 건수는 454건이다. 이 중 76%인 334건이 공공·민간 공사에서 발생했다. 이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 건설사 CEO들 왜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냐’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시사저널 자체 조사에 따르면 특별사면을 받은 70개 건설사(피합병이나 기업등기 말소 4곳 제외) 중 2015년 8월 이후 CEO직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여전히 40%에 이른다. GS건설(임병용)과 한화건설(최광호), 두산건설(이병화), 쌍용건설(김석준), 한신공영(태기전), 서희건설(곽선기) 등 28개 기업의 CEO가 2015년 8월부터 현재까지 대표직을 유지하고 있다. 당초 약속대로라면 이들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셈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당시 자정 결의 때 소외계층 지원을 위해 2000억원의 사회공헌기금을 연내에 조성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이 약속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2015년 11월 건설산업사회공헌재단이 출범했지만 지금까지 건설사들이 낸 돈은 106억2000만원에 그치고 있다. 매년 20억원 수준으로, 기금 조성을 약속한 지 5년여가 지났지만 실제 모금액은 5%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주요 건설사 CEO들이 매년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건설사 측은 비슷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최치훈 전 삼성물산 대표는 2017년 10월 국정감사장에서 “10억원 이상 기부는 이사회 결의사항”이라며 “이사회에 상정해 통과되면 기부하겠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삼성물산이 기부한 금액은 2018년과 2019년 각각 3억5000만원이 전부다. 비슷한 시기 삼성물산이 ‘최순실 게이트’의 중심에 있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15억원을 기부한 것과 대조되고 있다.

정수현 당시 현대건설 대표나 조기행 전 SK건설 대표는 “구체적인 이행 계획이 그동안 없었다”면서 “향후 실무자 협의를 통해 기부 시기나 용도를 마련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재단에 출연한 금액은 각각 9억6000여만원과 4억4000만원이 전부였다. 그나마 상위 건설사의 경우 일부지만 사회공헌기금을 출연했다. 하지만 50여 곳의 기업이 여전히 한 푼도 기금을 내지 않고 있다. 사면 혜택은 누리면서 사회공헌 약속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윤호중 의원이 2018년 10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상위 10개 건설사가 특별사면으로 직접적 이익을 얻은 공공 공사 수주액만 11조원에 이른다. 특별사면을 받은 나머지 64개 업체의 수주액까지 합하면 이익 규모는 훨씬 커질 것으로 추정된다.

건설업계는 그동안 건설 경기 하락에 따른 경영의 어려움을 이유로 들었다. 건설산업사회공헌재단의 한 관계자는 “2000억원을 단기간에 모으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2000억원을 은행에 예금하면 매년 30억원 정도의 이자가 나온다”며 “10대 건설사를 중심으로 매년 30억원을 걷는 방식으로 최근 재단 운영 방식을 변경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준식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세조사부 부장검사가 2017년 8월9일 액화천연가스(LNG) 저장탱크 건설공사 입찰 담합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준식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세조사부 부장검사가 2017년 8월9일 액화천연가스(LNG) 저장탱크 건설공사 입찰 담합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10대 건설사 영업이익 3년간 120% 증가

하지만 이 같은 방식은 건설업계가 일방적으로 정한 방식이다. 그나마 연 30억원 모금 약속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시사저널이 특별사면 이후 3년간 10대 건설사의 자산과 매출, 영업이익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0대 건설사의 자산은 2018년 기준으로 115조6617억원으로 3년 전(117조8587억원)보다 1.90% 감소했다. 하지만 같은 기간 매출은 84조1625억원에서 103조4595억원으로 22.90% 증가했다. 특히 영업이익은 2조7858억원에서 6조1349억원으로 120.2%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2018년 분할한 HDC현대산업개발 제외). 건설 경기 때문에 기부금을 내지 못했다는 업계 해명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업계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라도 담합에 따른 처벌 수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한다. 경실련 국책사업감시팀의 장성현 간사는 “지금까지 건설업계가 특별사면을 받은 것만 3번이다. 그때마다 자정을 밝혔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입찰 담합을 저지른 건설사들을 사면해 주는 관행 때문”이라며 “업계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라도 담합 비리에 대한 입찰 참가 제한 조치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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