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열풍] 100년을 이어온 트로트, 100년을 채운 트로트의 별들
  • 임진모 음악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15 15:00
  • 호수 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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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의 역사 트로트와 함께 시작
트로트의 힘, 전 국민적이고 세대 포괄적

트로트 음악의 역사는 깊다. 한국 전체 대중음악의 역사가 실은 트로트와 함께 시작됐다. 무려 100년 역사를 자랑한다. 무성영화 삽입곡으로 최초의 대중가요라는 타이틀을 얻은 이정숙의 《낙화유수》가 발표된 때가 1929년이다. 그 뒤 등장한 장르인 최희준·패티김의 스탠더드 발라드, 신중현·키보이스의 로큰롤, 한대수·김민기의 포크보다 최소한 30~40년 더 빠르다.

애초 도시의 세련된 음악으로 출발해 폭넓은 사랑을 받았지만 어느 순간 ‘뽕짝’이라는 멸시와 맞물리면서 트로트는 저학력과 가난의 서민음악으로 인식됐다. 또 70년대 이후 젊은 음악인 로큰롤과 포크 그리고 흑인음악에 밀리면서 주류와도 멀어졌다. 하지만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얼핏 은폐된 것 같아도 기성세대의 트로트에 대한 은근한 ‘물밑 사랑’은 흔들리지 않았다. 질긴 생명력의 음악이라고 할까. 아무리 사회적 지체가 높아도 고학력 소지자라도 나이가 들면, 노래방에 가면 자신도 모르게 트로트 한 가락을 뽑고야 마는, 지금도 살아 있는 ‘백 투 트로트’ 관습은 트로트의 꺾이지 않는 위상을 말해 준다.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된 트로트 음악의 힘은 무엇보다 전 국민적이고 세대 포괄적이라는 데 있다.

1952년 9월9일 한국전쟁 당시 위문 공연을 하는 가수 이난영(위)과 《애수의 소야곡》의 미성 가수 남인수. (오른쪽)우리 가요계 최초의 직업 대중가수이자 스타 채규엽 ⓒ연합뉴스
1952년 9월9일 한국전쟁 당시 위문 공연을 하는 가수 이난영(위)과 《애수의 소야곡》의 미성 가수 남인수. (오른쪽)우리 가요계 최초의 직업 대중가수이자 스타 채규엽 ⓒ연합뉴스

남인수와 이난영, 해방 전 트로트계를 빛내다

대중가요의 등장과 함께 인기가수 즉 스타가 출현했다. 30년대 우리 가요계 최초의 직업 대중가수이자 스타는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의 채규엽이다. 그는 1935년 잡지 ‘삼천리’의 인기가수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가 일본에 유학한 바리톤 가수라는 사실은 ‘신문화’ 트로트가 초기에는 도시의 지식인, 돈 많은 소시민층, 기생 등이 향유하던 세련된 음악이었음을 알려준다.

트로트 탄생기가 다름 아닌 일제 강점기라는 주장은 트로트의 태생적 한계로 따라붙는다. ‘트로트가 일본 것이냐 아니냐’는 국적 논쟁은 유서가 깊다. 그 불씨는 지금도 꺼지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트로트를 일본의 ‘엔카’로부터 영향을 받아 식민지 시대의 비탄 정서를 위해 일본에 의해 보급된 것이라며 비판적 해석을 가하지만, 일본 일각에서는 “엔카의 원류는 한국이며 특히 영남 쪽의 민요에 기원을 둔다”는 주장도 나온다. 트로트의 고된 숙명은 훗날 60년대에 ‘왜색’ 시비로 이어진다.

30년대 말부터 해방 전까지 수많은 트로트의 별들이 쏟아져 나왔다. 놀라울 정도의 긴 호흡을 자랑했던 《애수의 소야곡》의 미성 가수 남인수와 20세기 최고 가요로 손색이 없는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은 남녀 대표가수였다. 30년대 말 남인수의 인기는 지금의 방탄소년단 못지않아 공연이 끝나면 입구에 기생집에서 보낸 인력거가 줄을 섰다고 한다. 하늘이 내려준 비음이라고 할 이난영은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반야월과 더불어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로 통했다.

남인수·이난영과 더불어 이 시기에는 《짝사랑》의 고복수, 《나그네 설움》의 백년설, 《울고 넘는 박달재》의 박재홍, 《눈물 젖은 두만강》의 김정구, 《역마차》의 장세정 등이 맹활약했다. 해방 후에 등장한 가수로는 단연 《굳세어라 금순아》의 현인을 빼놓을 수 없다. 매우 심한 떨림을 강조한 특이한 음색으로 시대를 풍미해 《신라의 달밤》을 비롯한 그의 노래는 한동안 가수든 일반인이든 모창 단골 소재였다.

ⓒ연합뉴스·시사저널 포토
ⓒ연합뉴스·시사저널 포토

60~70년대의 별, 이미자와 남진·나훈아

라틴 댄스음악 그리고 한국전쟁 후 미군정 통치와 함께 재즈 스타일 스탠더드와 록 등 미국 음악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여전히 트로트는 막강했다. 특히 단조의 비애감을 강조한 구슬픈 멜로디는 60년대 경제개발의 어두운 한숨을 위로해 준 덕분에 경쟁 음악의 잇단 등장에도 대중 흡수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와 가요사의 명곡 《동백아가씨》 덕분이었다.

여타 가수들이 보여준 기교와 장식이 전혀 없는, 있는 그대로의 순정 보이스를 전한 이미자는 1964년 《동백아가씨》로 당시로는 경이적인 10만 장 이상, 요즘으로 치면 100만 장의 판매량을 거두면서 음악이 이제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알렸다. 지구레코드의 고(故) 임정수 회장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로 음반사를 차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왜색이라는 덫에 걸려 이미자의 3대 명곡으로 불리는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는 오랫동안 방송과 출반이 금지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동백아가씨》가 금지로 묶인 줄도 모르고 공개 석상에서 이 곡을 신청해 주변을 당혹스럽게 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왜색과 함께 트로트는 ‘뽕짝’이라는 멸시의 늪에도 빠지게 된다. 초기의 ‘쿨’한 음악이 이 무렵에는 ‘천’한 음악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미자 이전 《눈물의 연평도》의 최숙자 그리고 동시대 《바다가 육지라면》의 조미미, 《영산강처녀》의 송춘희 등 트로트 음악은 여가수들의 분전으로 성비 균형을 획득해 결코 남자 중심으로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트로트의 위력을 꼭짓점으로 끌고 올라간 주역은 두 남자가수 남진과 나훈아였다. 남진은 67년 《가슴 아프게》의 대박으로 우뚝 섰고, 나훈아는 69년 《사랑은 눈물의 씨앗》으로 인기 가도의 불을 지폈다. 남진과 나훈아는 동시대 야당 40대 기수인 목포 출신의 김대중, 부산 출신의 김영삼과 같은 지역 출신으로 영호남 대결의 양상을 띠면서 72년까지 한반도 반을 둘로 쪼개는 극심한 라이벌전을 펼쳤다.

음악 연구자들은 이때를 트로트의 실질적 마지막 전성기로 규정한다. 심지어 꼬마들도 “넌 남진이냐 나훈아냐”라는 질문을 강요받았으니 이처럼 세대를 망라한 맞수전은 다시 출현하지 않았다. 나훈아가 훗날 ‘트로트 황제’로 절대적 전설이 됐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지만 당대 라이벌전의 승자는 엄연히 남진이었다.

70년대는 신중현과 키보이스의 록(그룹사운드), 한대수·김민기·송창식·이장희·김정호의 포크가 청춘의 열정과 낭만을 대변하면서 유행음악으로서 트로트는 급속 위축됐다. 고군분투한 《잘했군 잘했어》의 하춘화가 있었지만 남진·나훈아 경쟁 같은 뜨거운 열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75년 대마초 파동과 가요 규제조치로 록과 포크가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되면서 트로트에 다시 조금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룹사운드 즉, 록 출신 가수가 대거 안전한 트로트를 택하면서 다소간 위력을 회복한 것이다. 시작이 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였고 그 뒤를 《오동잎》의 최헌, 《사랑만은 않겠어요》의 윤수일, 《정 주고 내가 우네》의 김훈, 《내게도 사랑이》의 함중아가 따랐다. 록이 트로트와 타협한 이 스타일을 ‘트로트 고고’라고 불렀다. 80년대 들어 ‘가왕’으로 솟아오른 조용필이 대중적 존재감을 트로트로 얻기 시작했다는 것은 적어도 그때까지 기성세대의 납득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말해 국민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트로트에 발을 담가야 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록의 피를 가진 조용필은 이후 록 밴드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며 록과 젊은 음악 중심의 활동을 했지만 1985년에는 3박자 트로트 《허공》을 불러 다시 트로트에 원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수은등》의 김연자와 《멍에》의 김수희는 대박이었고 79년 박 대통령 궁정동 시해 사건과 연루되어 공식 활동이 어려웠던 심수봉은 1984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로 날갯짓을 시작해 트로트의 상승기류에 힘을 보탰다.

ⓒ연합뉴스·시사저널 임준선
ⓒ연합뉴스·시사저널 임준선

트로트, 80년대 후반에 되살아나다

1980년대 후반에는 6공화국의 캐치프레이즈였던 ‘보통 사람들’의 이미지와 어울린 주현미와 현철이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자극적이고 매혹적인 음색의 주현미는 《신사동 그 사람》과 《짝사랑》으로 88년과 89년 MBC 가수왕을 거푸 수상했다. 현철 역시 《봉선화연정》과 《싫다 싫어》로 89년과 90년 KBS 가수왕을 연패했다.

이들의 경쾌한 폭스 트로트는 과거의 마이너 애상조와 작별하면서 트로트를 ‘관광버스용’의 위락 음악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도 받았다. 유행음악의 대세는 젊은이의 댄스와 발라드로 넘어갔다. 90년대에는 현철과 더불어 미국에서 돌아온 태진아·송대관·설운도가 ‘남자 트로트 4강 체제’를 구축했지만, 그 체제가 너무 오래가는 바람에 신예의 등장이 더뎌졌고 트로트의 스탠스는 더욱 좁아졌다.

2005년 2월 25살 젊은 가수 장윤정의 혜성 같은 등장은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폴카풍의 뽕짝 《어머나》가 TV 가요 프로 《생방송 음악캠프》에서 젊은 음악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장윤정의 인기는 다소간 트로트의 기사회생을 가져왔다. 장윤정 스스로도 “팬들도 젊은 가수가 부르는 색다른 트로트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했다.

《무조건》의 박상철, 《오빠만 믿어》의 박현빈, 《사랑의 배터리》의 홍진영 그리고 LPG, 뚜띠 등 젊은 트로트 가수들도 잇달아 출현했다. 심지어 아이돌 가수들도 트로트 시장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2007년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는 티(T)라는 프로젝트팀을 통해 《로꾸거》를 발표했고 빅뱅의 대성은 《날 봐 귀순》을 노래방의 골든 레퍼토리로 만들었다.

트로트의 파워는 선거 기간에 확인할 수 있다. 여야, 무소속 후보 가릴 것 없이 상당수가 로고송으로 트로트를 빌린다. 유권자 공략을 위해 트로트를 썼다면 그것은 여전히 트로트의 서민적 흡수력을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압도적 기술문명에 허우적거리는 사람들한테는 ‘고향’ 같은 음악이 트로트다. 지난해부터 음악계를 강타하고 있는 트로트 흐름 역시 트로트의 무궁한 힘이 오랜만에 발휘된 산물로 볼 수 있다.

아직은 세대를 관통하는 열풍이라기보다는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등 TV 프로그램 인기인 것 같지만 트로트에 ‘부활’의 가능성이 주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그동안 주류에서 소외돼 매체에 덜 비친 게 도리어 음악 인구의 반가움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트로트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과연 젊은 층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가장 중요한 ‘시장성’이 결정될 것이다.

2000년대 후반 영스타들인 슈퍼주니어와 대성이 가담했음에도 그 물결이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트로트 시장이 허약하고 확장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진정한 열풍으로 번지려면 판을 전복할 만큼의 큰 히트곡 하나와 장윤정에 버금가는 화제의 인물이 필요하다. 그래도 트로트에는 기나긴 역사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서민대중 저 아래로 파고드는 유서 깊은 ‘물밑사랑’을 자극하는 노래와 가수가 출현한다면 더 확실한 인기몰이 음악은 없을 것이다. 다시 트로트에 기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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