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열풍] BTS ‘아미’ 못지않은 팬심…트로트 열풍 뒤엔 이들이 있었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0.03.14 11:00
  • 호수 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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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팬클럽으로 성장해 트로트 가수 물심양면 응원

“미스터트롯 방송 이후 팬클럽 회원 수가 20배 넘게 불어났습니다.”

TV조선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에 출연한 가수 임영웅(29)은 요즘 팬클럽 회원 3만5000여 명을 거느린 대스타가 됐다. 방송 녹화장, 공연장 등 그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구름떼 같은 팬이 뒤따른다. 올해 초 《미스터트롯》 방송이 시작되기 전 그의 포털사이트 팬카페 ‘영웅시대’ 회원 수는 1500여 명이었다. 방송에서 주요 출연진, 우승 후보로 승승장구하며 회원 수는 20배 넘게 늘어났다.

지난해 2~5월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을 표방하며 방영된 TV조선 《미스트롯》은 가요계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1년 후 《미스트롯》 시즌2인 《미스터트롯》과 MBC에브리원 《나는 트로트 가수다》, SBS 《트롯신이 떴다》, MBN 《트로트퀸》 등이 트로트 열풍에 더욱 불을 지폈다. 가수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지만, 열풍을 이끈 숨은 주역은 뭐니 뭐니 해도 열광적인 팬클럽이다. 트로트 열풍 전후로 속속 결성된 신흥 스타들의 팬클럽은 대규모 조직과 십시일반 후원금을 통해 모은 예산, 체계적인 회칙 등을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과거 트로트 가수 팬클럽은 대부분 작은 규모에 활동도 활발하지 않았다. 가요시장에서 트로트 자체가 비주류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트로트를 부르는 가수 중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톱스타 외엔 설 수 있는 무대가 지역 공연 등으로 한정됐다. 장윤정(41), 박현빈(39), 홍진영(36) 이후 이렇다 할 거물급 가수도 탄생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부터 불어닥친 트로트 광풍에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미스트롯》 출신 스타 홍자가 1월22일 야외 공연장에서 노래하며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스트롯》 출신 스타 홍자가 1월22일 야외 공연장에서 노래하며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연 프로그램 출연 후 팬 폭증

일약 슈퍼스타로 떠오른 송가인(35), 홍자(36), 임영웅, 박서진(26), 영탁(38), 이찬원(25) 등 트로트 가수들은 현재 팬카페 회원 수가 적게는 1만여 명에서 많게는 5만5000여 명에 이른다. 장윤정(1만여 명), 홍진영(7200여 명), 남진(3800여 명), 박현빈(2600여 명) 등 기존 톱스타들을 압도하는 수치다. 팬카페 회원 수를 인기의 척도로 내세울 순 없어도 신흥 스타들이 엄청난 팬덤을 보유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울러 방송에서 다듬어지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 가수의 이미지, 스토리 등은 팬클럽 결속력을 더욱 강하게 했다. 화제가 된 트로트 프로그램의 주요 출연자들은 데뷔 후 오랜 무명 시기를 겪은 사실을 털어놓은 바 있다. 자연스레 이들의 팬클럽 내에는 ‘오랜 기간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다’ ‘이제라도 빛을 봐서 다행이다’ ‘앞으로 우리가 더 열심히 응원하겠다’는 정서가 짙게 깔렸다. 가수 역시 방송과 팬덤을 바탕으로 무명 생활을 청산한 만큼 팬클럽과 ‘운명 공동체’를 이룬 모습이다.

지난 1월12일 천안에서 열린 《미스트롯》 출연자 콘서트 직후 홍자 팬클럽 ‘홍자시대’ 회원 100여 명은 홍자의 데뷔 8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팬미팅을 겸한 이 행사는 흡사 유력 정치인의 대선 출마 현장을 방불케 했다. 팬들은 팬클럽 상징인 보라색 옷을 맞춰 입고 공연을 마친 홍자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사회자가 “전체 차렷! 대장님(팬클럽 회원들이 홍자를 지칭하는 표현)께 경례!”라고 외치자 자칭 ‘홍 일병’인 팬들은 “충성!” 구호를 외치며 홍자에게 경례했다. 이후 사회자의 “사랑해!” 선창과 회원들의 “영원히! 홍자만!” 후창이 세 차례 이어졌다. 꽃다발 전달식, 헌정 시 낭독식 등도 있었다. 헌정 시를 낭독한 노년의 남성 팬은 “내게 가장 소중한 인연이 당신(홍자)과의 만남”이라고 말했다. 홍자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팬들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다.

남녀노소 팬 고루 모으며 연예계 판도 바꿔

이날 천안을 찾은 홍자시대 회원들은 한마디로 ‘남녀노소’였다. 주축인 노년과 중장년층 사이에 청년들도 보였다. 트로트의 저변이 넓어졌다는 방증이다. 트로트 팬 김현욱씨(33)는 “인기를 끌고 있는 트로트 가수들은 나와 비슷한 나이대다. 트로트가 더 이상 ‘올드’하기만 한 문화도 아니다”면서 “꿈, 가치관 등이 다양해진 우리 세대에 트로트라는 한 장르를 통해 성공한 또래의 모습이 친근하기도 부럽기도 하다”고 전했다. 임영웅 팬클럽 영웅시대 회원인 오순희씨(67)는 “팬클럽 구성이 10대부터 80대까지로 다양하다. 《미스터트롯》 방송 이후 젊은 사람들이 팬클럽에 많이 가입했다”면서 “이제 가수를 응원하는 많은 방법이 컴퓨터로 이뤄지고 있는데, 젊은 회원들이 없었으면 어찌할 뻔했나 싶을 정도로 너무 고맙다”고 했다.

트로트 팬덤이 사회나 정치권도 해결하지 못한 세대 통합마저 이뤄내고 있는 셈이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트로트는 그간 중장년층의 전유물처럼 치부된 바 있지만, 그 저변이 젊은 세대로까지 넓어지면서 전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 자리하기 시작했다”며 “기성세대들은 트로트 열풍을 통해 그간 소외돼 있던 문화 소비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카타르시스를 맛봤고, 젊은 세대들은 B급 정서와 A급 콘텐츠를 넘나드는 트로트라는 장르의 새로움에 빠져들었다”고 해석했다. 이어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에서 젊은 출연자들이 기성세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온 트로트로 경연을 벌인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세대 통합적인 시너지를 만들어낸다”면서 “젊은 세대들이 해석하는 트로트의 재기발랄한 재미와 트로트 자체가 가진 인생의 깊이를 담은 노래의 묘미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왼쪽)박서진의 공연장에 모인 팬클럽 회원들 (오른쪽)요요미가 공연 후 팬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유튜브 캡쳐·뉴스1
(왼쪽)박서진의 공연장에 모인 팬클럽 회원들 (오른쪽)요요미가 공연 후 팬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유튜브 캡쳐·뉴스1

포털 랭킹에 트로트 팬카페 줄줄이 포진

전 세대를 아우르는 인기가 없었다면 포털사이트 카페 랭킹에서 트로트 가수 팬클럽 이름이 등장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임영웅의 팬카페 영웅시대 회원 수는 3월11일 기준 3만5326명이다. 이 숫자는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다. 기자가 3월10일 오전 회원 가입 후 ‘등업(정회원 지위 취득)’ 신청을 하자 곧바로 다른 회원들의 환영 댓글 여러 개가 달렸다. 이어 줄줄이 다른 신규 회원들의 등업 신청이 올라왔다. 이날 하루만 1261명이 영웅시대에 가입했다.

영웅시대는 포털사이트 다음의 팬카페 가운데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다. 이 랭킹은 회원들의 카페 방문, 게시글·자료의 등록과 조회 등 카페 내 활동을 기준으로 점수를 계산해 산출한다. 현재 가장 활성화된 카페란 말이다. 아이돌그룹 아이즈원(5위), BTS(6위), 세븐틴(7위), SF9(8위) 등이 뒤를 이었다. JTBC 《슈가맨3》에 출연하며 신드롬을 일으킨 가수 양준일(52)이 10위에 올라 있었다. 이찬원(11위), 조명섭(24위), 정동원(30위), 박서진(31위), 장민호(35위), 양지원(39위), 김수찬(40위), 김희재(43위) 등 트로트 가수 팬카페도 50위권 내에 있었다. 팬카페를 넘어 전체 카페 랭킹 톱10에서도 영웅시대를 찾을 수 있다. 연예인 관련 카페로는 유일하다.

트로트 가수들의 팬클럽 회원 수가 급증함에 따라 공연장에서 세 대결이 벌어지기도 한다. 수많은 팬을 몰고 다니며 ‘트로트계 아이돌’로 불리는 박서진은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 “내가 신인이다 보니 팬클럽에서 기죽지 말라고 많이 모여 누구보다 크게 응원해 준다”고 밝혔다. 박서진의 공연장에는 팬들이 탄 45인승 버스가 적게는 8대에서 많게는 20대까지 모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팬들은 직접 제작한 응원봉, 플래카드 등 응원 도구를 들고 가수가 전국 방방곡곡 어느 공연장에 있든 응원한다. 또 각 가수의 팬카페에서 팬들은 ‘라디오에 가수 노래 신청하기’ ‘음원 차트에서 가수 순위 올리기’ 등 방법도 공유하며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혹여 가수에게 누 될까 ‘개념 응원’ 강조

다만 과도한 팬심이 가수에게 혹여 누를 끼칠까 ‘개념 응원’도 강조한다. 요요미의 팬카페 ‘난다요요미’엔 ‘필독’ 공지 글을 통해 회원들에게 공연장 에티켓을 제시해 놨다. ‘가수 대기실 출입 금지’ ‘정해진 시간 외 영상 및 사진 촬영 금지’ 등이 골자다. 팬카페 운영자는 “우리가 응원하는 가수를 차분하고 수준 있게 응원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규칙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가수가 출연한 공연이 끝나면 의자 정리, 쓰레기 수거 등을 도맡는 팬클럽도 있다. 박서진 팬카페 회원들은 콘서트 암표 거래 정황이 포착됐다는 소식에 “우리는 절대 암표를 사지 말자” “우리 가수를 위해 정당하지 않은 일은 그 어떤 것이든 해선 안 된다”는 글들을 게시판에 올렸다.

더 나아가 팬들은 가수의 이름으로 기부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미스터트롯》 스타 이찬원의 팬들은 3월9일 코로나19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영남대병원에 1566만원을 기부했다. 영남대는 이찬원이 재학 중인 학교다. 앞서 송가인(3244만원), 홍자(2000만원), 박서진(3000만원) 팬클럽도 코로나19 관련 기부금을 기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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