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된 ‘재야 사학자의 대부’ 故 이이화 선생을 추억하며
  • 정운현 언론인(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jongseop1@naver.com)
  • 승인 2020.03.20 12:35
  • 호수 1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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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이화 선생, 3월18일 향년 84세로 타계…민중사관에 바탕 둔 역사학에 열정 쏟아

“어이, 정 국장! 우리 패거리들 인사동에서 술 마시고 있으니 얼른 오게!”

이따금 늦은 밤에 집으로 전화를 걸어 호출하곤 했던 분이었다. 가끔 신간을 냈을 때 전화를 걸어 잘 읽었노라고 인사를 드리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셨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얘기다. 이 선생께서 지난 3월18일 향년 84세로 타계했다. 달포 전 정남기 전 언론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이 선생께서 위중하시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이번엔 끝내 일어나지 못하셨다.

선생은 일평생 재야 역사학자로 활동하셨다. 선생이 이룬 학문적 성과나 명망으로 치자면 역사학계 주변 관변단체의 장 자리 하나 정도는 꿰찼을 법도 하나 무관(無官)으로 일관했다. 민간단체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낸 것이 고작이었다.

체구는 자그마했지만 기질은 호방하면서도 서민적인 풍모를 갖고 있었다. 이는 학문을 하는 자세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역사 서술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또 책상물림보다는 현장을 발로 뛰며 증언과 자료수집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래서 비록 재야 사학자였지만 강단 사학자들도 선생을 결코 가벼이 보지 않았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이이화 선생의 빈소 ⓒ시사저널 이종현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이이화 선생의 빈소 ⓒ시사저널 이종현

주역의 대가 야산 이달 선생의 넷째

선생은 1937년 대구에서 야산(也山) 이달(李達, 1889~1958)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부친 이달 선생은 근대 이후 주역의 대가로 손꼽히는 분이다. 일화도 많다. 6·25 전쟁이 터질 것을 예견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충남 안면도(安眠島), 이후 부여 은산면으로 가서 전화(戰禍)를 피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선생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부친을 따라 전북 익산으로 이주했는데 부친이 학교를 보내지 않아 대둔산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사서(四書)를 배웠다. 충남 부여에 살던 15세 때 선생은 집을 뛰쳐나왔다. 학교에 가고 싶어서였다. 간난신고 끝에 광주고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훗날 중앙대에 편입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다녔으나 그마저도 1년 만에 중퇴했다. 이후 아이스케키, 빈대약, 가루치약, 군밤 등을 팔았고 술집 웨이터, 학원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생업전선을 뛰었다. 그런 와중에도 선생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선생은 학문하기를 좋아했다. 어릴 적 꿈은 문학도였다. 광주고 재학 시절 학예부장, 문예반장을 하면서 한때 문명(文名)을 날렸다. 그러나 생업으로 인해 이 같은 꿈을 접어야만 했다. 32세 때인 1967년 동아일보사 출판부에 임시직으로 취직해 ‘동아연감’ 편집작업에 참여했으며, 이듬해에는 신동아 별책부록 ‘한국고전 100선’을 만들며 천관우, 박종홍, 임창순 등 당대의 유명 학자들과 교류했다. 이후에도 동아일보 조사부에 임시직으로 근무하면서 축쇄판 기사색인 작업을 맡았다. 이 시기에 선생은 식민지 시대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선생은 부친 슬하에서 배운 한문 실력이 출중했는데 이는 한국사 연구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됐다. 1974년 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 전신) 산하 국역연수원에서 한국사 연구를 시작했다. 이후에는 서울대 규장각에서 고전 해제 및 편집작업을 담당했다. 전두환 신군부 시절인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전문위원으로 스카우트돼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에 참여했다. 전문위원 직급이 서기관이었으니 그만하면 괜찮은 자리였으나 1년 만에 그만두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 시대를 미화할 것을 강요받고서였다.

신문사와 한국사 관련 연구기관에서 근무하는 동안 선생의 학문적 소양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또 역량도 키워졌던 것 같다. 그 무렵부터 선생은 역사 관련 글을 서서히 발표하기 시작했다. 1973년 신동아에 ‘신규식 평전’을 실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해 창작과비평에 ‘허균과 개혁사상’을, 1975년에는 ‘북벌론의 사상적 검토’를 실어 학계의 호평을 받았다. 뒤이어 순수학술지인 한국사연구에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를 발표하면서 한국사 연구자로서 이름을 얻게 됐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한국사 저술가로 나섰다.

이이화 선생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는 2019년 6월26일 파주 헤이리에서 진행된 시사저널 인터뷰였다. ⓒ시사저널 최준필
이이화 선생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는 2019년 6월26일 파주 헤이리에서 진행된 시사저널 인터뷰였다. ⓒ시사저널 최준필

역사에서 소외된 이들 발굴해 재평가

선생은 태생적으로 반골 기질이 강했다. 승자 위주의 전통적 역사관보다는 민중사관에 바탕을 둔 역사학에 열정을 쏟았다. 지난 역사 속에서 탄압받고 왜곡돼 온 사람들을 발굴해 내고 이들을 재평가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선생이 동학혁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한동안 ‘동학난’으로 불리던 것을 토론회에서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으로 고쳐 부르자고 주장했다. 동학 관련 방대한 자료집 편찬은 물론 특별법 및 동학농민혁명 기념일(5월11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는 데도 적극 앞장섰다.

선생은 1986년 2월에 설립된 역사문제연구소 참여를 통해 민중사학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설립자금을 댄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의 요청으로 참여한 이후 연구소 부소장, 소장, 고문 등을 지냈다. 그 시절 선생은 연구소를 이끌던 정석종 영남대 교수, 문학평론가 임헌영씨,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등과 교분을 나눴다. 이 밖에도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등과 함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대표를 맡기도 했다.

선생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역사 대중화를 들기도 한다. 선생은 자유분방한 행동만큼이나 글쓰기도 파격적이었다. 시대사·왕조사·사건사 중심의 기존 역사 서술 방식에서 생활사·민중사 등 미시사 중심으로 글을 썼다. 100여 권의 저서 가운데 선생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전 22권)는 10년간의 노력 끝에 얻은 결실이다. 이 책을 출간한 한길사의 김언호 사장은 집필 기간 동안 선생의 생활비를 대면서 뒷바라지했다. 한반도 출현기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를 다룬 이 책은 역사 속에서 묻히고 잊힌 노비·백정·여성 등 하층계급의 삶을 역사의 일부로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생전에 선생과 교류했던 사람들은 선생의 해박한 역사 지식, 구수한 입담, 소탈한 면모를 잊지 못할 것이다. 약주와 줄담배를 즐겼으며 술자리에서는 논쟁하기를 좋아했다. 외출할 때면 사시사철 ‘빵떡모자’에 항상 정장 차림의 신사였다. 정부는 선생의 타계를 애도하며 대통령 조화와 함께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민중사학자, 재야 사학자의 대부로 불린 선생의 삶은 이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또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선생의 영원한 안식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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