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테이젼》 《감기》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것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28 10:00
  • 호수 158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폭동·사재기·지역폐쇄는 없었다…한국이 주도하는 감염병 대응

2011년 개봉작 《컨테이젼》이 뒤늦게 떴다. 코로나19 때문이다. 개봉 당시 나름 화제작이었는데도 22만 명 관객 동원에 그칠 정도로 ‘폭망’했다. 영화가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이 영화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에 맷 데이먼, 로렌스 피시번, 주드 로, 기네스 펠트로 등 화려한 출연진으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특정 캐릭터를 영웅적으로 부각시키는 일반 상업영화의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 소더버그 감독은 2003년 사스 사태, 2009년 신종플루 사태 등을 보고 대감염(pandemic·팬데믹) 영화를 기획했다. 작가는 세계보건기구(WHO) 전문가에게 팬데믹 모델을 자문받고, 신종플루에 대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대응을 조사해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썼다.

그래서 과학계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백신 전문가인 폴 오핏은 “과학 관련 영화의 경우 과학적인 사실을 드라마를 위해 희생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컨테이젼》은 그 반대”라고 말했다. 바로 그래서 흥행에 실패했다. ‘과학적인 사실을 위해 드라마(극적 재미)를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영화 《컨테이젼》의 한 장면 ⓒ(주)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컨테이젼》의 한 장면 ⓒ(주)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가 예측한 선견지명

그 흥행 실패 이유가 지금에 와선 재평가 사유가 됐다. 실제로 팬데믹이 우리에게 닥쳤기 때문이다. 감염병 사태를 그린 것 자체가 이목을 집중시켰다. 나에게 닥칠 일이라고 실감하면서 보니까, 극 중의 감염병 확산에 그 어느 스릴러보다도 서스펜스를 느끼며 몰입한다.

극 중에서 병이 발생한 과정도 코로나19와 겹쳤다. 박쥐의 배설물을 먹은 새끼 돼지를 홍콩의 요리사가 비위생적으로 조리하다 손을 씻지도 않고 관광객과 악수하며 세계 전파가 시작됐다. 소더버그 감독이 사스를 참고했기 때문이다. 사스는 중국의 박쥐에서 출발해 사향고양이를 거쳐 사람에게 옮은 것이었다. 코로나19도 중국의 박쥐에서 출발해 중간 동물을 거쳐 사람에게 옮았다는 보도가 나오자 사람들은 《컨테이젼》의 설정에 더 몰입하게 됐다.

2013년작 《감기》도 비말에 의해 호흡기로 전염되는 신종 바이러스를 소재로 했기 때문에 코로나19 정국에 주목받았다. 특히 기침할 때 입에서 나온 비말이 다른 사람에게로 이전되는 과정을 그래픽 처리로 구현해 큰 관심을 받았다.

《감기》에선 정부가 도시를 폐쇄하고 온 시민을 강제 수용해 버린다. 소생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은 시신과 함께 방치되는데, 이탈리아에서 회생 가능성이 떨어지는 고령자가 방치된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사람들은 《감기》에 더 몰입하게 됐다. 중국과 스페인이 특정 지역을 폐쇄하고, 그 후 잇따라 선진국에서 지역폐쇄 소식이 전해진 것도 영화를 실감 나게 했다.

영화 속에서 자국의 이익만 중시하는 미국이 개입하면서 최악의 상황이 닥치고 시민들은 결국 폭동을 일으킨다. 미국의 이기적인 태도와 그런 미국에 전시작전권을 내맡긴 우리의 옹색한 처지는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종종 그려지는 설정이다. 《감기》도 그런 설정을 활용하다 보니 미국에 맞서는 우리 대통령이 ‘선인’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대통령 한 명만 선인일 뿐 기득권 시스템은 모두 자기 보신에만 급급하다. 정치인들은 감염병 사태마저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 이것은 우리 행정 시스템에 대한 국민 일반의 불신을 반영한 것이면서, 현실에서 나타나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코로나19 사태에서 유럽, 미국 등의 하루 확진자가 중국을 이미 뛰어넘은 상황인데도 일부 정치인은 중국인 입국 금지만을 주문처럼 외치며 정치공세에 골몰해 씁쓸함을 더했다.

《컨테이젼》에는 인종차별적 시선도 깔려 있다. 병은 아시아에서 생기는데, 아시아 사람들은 거기에 과학적인 대응을 못 하고 미국의 전문가들이 문제를 해결해 낸다. 감염병을 그린 또 다른 미국 영화 《아웃브레이크》에선 한국인이 퍼뜨린 병을 미국이 해결한다. 《감기》는 애국주의 정서를 담았기 때문에 한국인이 병을 해결한다. 하지만 한국 감염병 사태 대응을 미국 CDC 전문가가 주도한다는 설정으로 미국의 위상을 인정했다. “미국이 세계 최고 아니오.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극 중 대사다.

영화 《감기》의 한 장면 ⓒ(주)아이러브 시네마
영화 《감기》의 한 장면 ⓒ(주)아이러브 시네마

영화에는 없는 ‘한국의 시민정신’

하지만 이 영화들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코로나19라는 감염병 대위기 사태의 대응을 한국이 주도할 줄 말이다. 세계적인 과학저널 사이언스는 “유럽이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유행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도 유럽 국가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보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끔찍한 상황에서 한국의 방역 시스템은 ‘희망의 징후’이자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고 썼다. WHO 사무차장은 한국 대응을 “교과서 같은 우수 사례”라고 말했다. CNN,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로이터통신 등 서방 주요 언론들이 잇따라 한국을 본받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각국이 한국의 대응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사태 초기 한국 탈출 조짐을 보였던 외국인 프로선수들이 팬데믹 이후엔 오히려 앞다퉈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이 안전하다는 것이다. 미국 진단센터가 한국에 진단 키트를 요청했다. 미국의 라디오 진행자 하워드 스턴은 트럼프 재선 슬로건을 ‘미국을 한국처럼 위대하게’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WHO도 아니고 CDC도 아닌 한국 질병관리본부가 국제 감염병 위기를 주도하는 설정은 그 어느 영화도 그리지 못했다.

두 영화 모두에서 감염병 사태는 폭동으로 이어졌다. 《감기》에서 총리는 “인간이란 게 위기상황에서 절대 침착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지역폐쇄도 등장했다. 이 영화들은 이마저도 생각하지 못했다. 위기에도 침착한 한국 국민이 있다는 사실과 폐쇄하지 않고도 상황을 관리하는 리더십이 있다는 걸 말이다. 주요 선진국에서 일제히 생필품 사재기가 일어났지만 한국에선 그런 징후조차 없었다. 대구·경북은 폐쇄되지 않았다. 폭동도 없었다.

영화에선 당국이 무능했지만, 코로나19 사태에서 우리나라는 적극적인 검사와 투명한 정보 공개로 패닉을 막았다. 유불리를 따지며 악재를 숨기지 않았다. 선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패닉이 일어나자 한국의 시민 정신이 주목받는다. 프리드리히 나우만재단 한국사무소장은 독일 일간지에 “서울에서 보니 베를린이 제3세계의 여느 도시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한국이 더 선진적으로 느껴진다는 이야기다.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현시점에선 한국의 대처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어느 영화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