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다락방이 통곡한다
  • 소종섭 편집국장 (jongseop1@naver.com)
  • 승인 2020.03.30 09:00
  • 호수 1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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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안 들어오는 집에 살았습니다. 사랑방, 문간방이 있는 양철집이었습니다. 아랫동네로 이사했습니다. 경운기에 짐을 싣고 이사하던 그날 풍경이 지금도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그때부터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히는 전기라는 존재! 그야말로 신세계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등잔불과 촛불을 켜고 생활하다가 만난 별천지였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입학한 1980년 일입니다.

이사한 곳은 기와집이었습니다. 새집이라 좋았습니다. 전에 없던 구조가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반지하였습니다. 상하지 않게 음식을 보관하기도 했고 각종 잡동사니들을 넣어두던 공간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다락방이었습니다. 안방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다락방이 나왔습니다. 저는 반지하의 칙칙함보다 천장 낮은 다락방의 너른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다가 잠들곤 했습니다. 조그만 창으로 마당을 내려다보는 느낌도 색달랐습니다.

제 기억에 각인돼 있는 방은 다락방입니다. 안방도 사랑방도 있었지만 다락방은 제 추억의 공간이었습니다. 방은 주로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쉬고 싶을 때,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을 때 찾는 게 방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낯선 방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방, 게임방, 비디오방, 소주방, 복권방…. 노래방은 1992년에 처음 생겼고 다른 방들도 그때를 전후해 속속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때만 해도 일탈이 있기는 했지만 노래방에서는 노래를 불렀고 게임방에서는 게임을 했고 소주방에서는 소주를 먹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방들이 생긴 것은 그다음입니다. 키스방, 안마방, 샤워방, 귀청소방, 애무방, 대딸방…. 검색을 하다 보니 별별 방들이 다 있네요. 이름에서 짐작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 중에는 이름만 이렇게 내걸었지 사실상 불법 성매매를 하는 곳들도 있습니다. 이름과 실체가 일치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지난해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학교 경계로부터 직선거리 200m 안에 이들 업소는 102곳(2017년)에서 107곳(2019년)으로 늘었습니다.

‘n번방(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씨가 3월25일 종로경찰서를 나서며 손석희 JTBC 사장, 윤장현 전 광주시장, 김웅 프리랜서 기자 등을 언급해 그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연합뉴스
‘n번방(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씨가 3월25일 종로경찰서를 나서며 손석희 JTBC 사장, 윤장현 전 광주시장, 김웅 프리랜서 기자 등을 언급해 그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랬는데 이번에는 ‘n번방’ ‘박사방’까지 등장했습니다. 방은 방인데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방, SNS 방입니다. 실체를 감추려는 방이지요. 알고 봤더니 성착취 동영상을 공유하는 방입니다. ‘방의 오염’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상황을 말해 줍니다. 이제 대대적인 소독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디지털 성범죄가 갈수록 조직적이고 대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성들의 낮은 성 의식과 운영자 및 이용자에 대한 가벼운 처벌이 오늘의 사태를 불렀습니다. 최대 음란포털이었던 ‘소라넷’ 운영자는 징역 4년 판결에 그쳤고 세계를 놀라게 한 아동 대상 성범죄 공유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는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아동·청소년과 관련한 음란물을 제공-판매-구입한 이들은 물론이고 성착취나 성학대 영상물에 대해서도 강력한 처벌 입법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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