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막을 수 있었다’…국회에서 잠자는 법안
  • 조규희 정치 전문 프리랜서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30 12:00
  • 호수 1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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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청원 500만 넘기자 뒤늦은 대책 발표…디지털 성범죄 관련 국회 민낯 드러나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거세다.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을 향한 공분과 익명 속에 숨어 있는 26만 명을 향한 칼날이 날카롭지만 대의기관인 국회와 정치권은 실종 상태다. 가장 민첩하게 국민 뜻을 받들어야 하는 국회는 ‘법을 만들어 달라’고 청원까지 한 10만 명의 국민 의사를 무시했다.

총선을 앞두고 청와대 국민청원이 500만 명을 넘기자 민심을 받들겠다며 각 정당들이 법안을 마련했다.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여길 수도 없는 처지다. 새로 내놓은 법안들이 이미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관련 법안과 유사한 탓이다. ‘있는 법안’도 처리하지 못한 정치권이 총선 정국에서 표심만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진정성이 의심되고 부실 법안 마련에 우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3월23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의 ‘텔레그램 n번방 성폭력 처벌 강화 긴급 간담회’에서 이인영 원내대표(왼쪽 세 번째) 등 참석자들이 처벌 강화 촉구 손팻말을 들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3월23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의 ‘텔레그램 n번방 성폭력 처벌 강화 긴급 간담회’에서 이인영 원내대표(왼쪽 세 번째) 등 참석자들이 처벌 강화 촉구 손팻말을 들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10만 명 국민 의사 무시…청원 기본 사실 확인도 안 해

조주빈은 2019년 9월부터 텔레그램에 ‘박사방’을 만들어 성착취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단체는 수사를 촉구했고, 2월 국회 청원 사이트에는 디지털 성범죄 처벌 수위 강화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등록됐다. 청원 등록 후 30일 내 10만 명이 동의한 경우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해 관련 안건을 심의하는 국회 전자청원제도에 따른 것이다.

청원인은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여자 연예인, 지인 얼굴을 합성하는 딥페이크(기존 인물의 얼굴이나 특정 부위를 합성한 영상 편집물) 포르노나 불법 촬영물 또한 텔레그램을 통해 유포·매매되고 있다”고 청원 이유를 밝혔다. 관련 안건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위원회에 회부됐지만 청원 취지와 무관한 개정 법안이 통과됐다. 국회 국민청원 1호 안건에 대한 국회의 안일한 인식만 드러낸 꼴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는 3월3일 출입국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 통신비밀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 등 총 24건의 안건을 심의했다.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도 안건에 포함됐다.

회의록을 살펴보면 권태현 전문위원은 이날 제1소위에서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사항이 있어 소위에 회부됐다”며 “개정안은 딥페이크 제작, 유통 행위를 처벌하고 영리 목적 유통 행위는 가중 처벌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n번방’ 사건의 주요 내용인 성착취물 관련 제작과 유통에 대한 언급 없이 딥페이크 범죄에 집중했다. 회의 도중 김도읍 미래통합당 의원은 “청원한다고 법 다 만듭니까?”라고 묻기도 했다. 

정작 딥페이크 영상물 제작 처벌 관련 논의에도 “극단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 혼자 스스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지 않나”(소위원장인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 “자기 만족을 위해서 영상을 가지고 혼자 즐긴다는 것까지 갈 거냐”(정점식 미래통합당 의원), “자기는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도 있거든요”(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 등 발언이 나오는 등 디지털 성범죄 인식 수준을 드러냈다.

논란이 일자 송 의원은 “범죄 실행의 착수, 즉 유포 행위를 실행하지 않은 사람에게 딥페이크 영상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 처벌 조항을 두는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 논의하던 중에 나온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김 의원도 “현행법으로 처벌 가능한지 따져보고 효과적인 방안으로 처리하자는 차원의 의미였다”는 입장문을 내놨다.

김재련 변호사는 “국회 청원 1호 관련 회의록을 보니 딥페이크가 예술이라는 등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의원과 정부의 인식 수준을 그대로 드러낸 꼴”이라며 “피해자 감수성이 제로”라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자기들도 음란 영상물을 보고 자라왔고 남자가 이 정도는 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라며 “성착취물 제작과 유포로 피해자의 삶이 얼마나 치명적으로 바뀌는지 공감을 못 하는 연대감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n번방’ 차단 법안 126건 논의도 없이 묵혀온 20대 국회

여야 정치권은 뒤늦게 ‘n번방’ 사건 대응에 전력을 쏟고 있다. 백혜련 민주당 의원은 3월23일 ‘n번방 사건 재발 금지 3법’을 발의했다. △성적 촬영물을 이용해 협박하는 행위를 형법상 특수협박죄로 처벌 △상습범 가중처벌·불법 촬영물 다운로드 시 처벌 △온라인 서비스 제공자 처벌 등이 주 내용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의당 공약을 언급하면서 “n번방을 비롯한 성범죄에 대해서는 좌우, 진보, 보수, 여야 가릴 것 없이 합심해서 21대 국회에서 최우선 과제로 처리할 것을 제안한다”고 했다. 앞서 국민의당은 스토킹 방지법과 그루밍 방지법 등을 발표했다.

황교안 통합당 대표는 24일 페이스북에 “n번방은 단순한 일탈 공간이 아니라, 반사회적인 집단이 모여 있는 범죄 소굴”이라며 “이 엽기적인 사건에 돈을 주고 참여한 회원들도 철저히 수사해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여성과 아동의 안전만큼은 제대로 지켜주자”며 “디지털 성범죄집단을 확실히 소탕하자”고 했다.

뒤늦은 대응이 질타받고 있는 가운데 이미 관련 법안이 오래전부터 국회에 발의된 상태에서 내놓은 대책이라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20대 국회에서 성폭력 범죄 관련 법안 발의는 176건에 달한다. 이 중 16건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으며 126건은 여전히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특히 2019년 3월13일 윤소하 정의당 의원 외 10명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 개정법률안 제안 이유로 “디지털 성범죄의 구성요건 및 처벌 수준을 재조정하고, 온라인 서비스 제공자의 의무 및 의무 위반 시 처벌 규정을 신설함으로써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해 5월3일 유승희 민주당 의원은 자신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에서 “최근 성범죄를 저지른 현직 초등학교 교사가 음란물 유포죄로 처벌받은 사실을 수사기관으로부터 통보받고도 해당 교육청은 관련법상 직위해제 기준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직위해제를 하지 않아 논란이 된 바 있다”며 “성범죄를 저지른 교사와 공무원에 대해 직위해제 등 엄격한 법 적용을 통해 피해자를 두텁게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선미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0월30일 관련 법안 발의 이유로 “촬영물을 실제 유포하지 않더라도 이를 반포·판매·임대·제공 또는 공공연하게 전시·상영할 것이라고 고지해 다른 사람을 협박하거나 강요한 경우를 성범죄로 처벌하도록 함으로써 불법 촬영 범죄로 인한 2차 가해를 방지하고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1월 이종배 통합당 의원 대표 발의 법안은 강간, 강제추행, 강간살인 및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죄 등의 예비·음모행위 처벌에 목적을 두고 있다. 모두 당시 디지털 성범죄 관련 사안에 대응하거나 현행법상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논의하기 위한 발의였다. 해당 법률들이 국회에서 잠자지만 않았더라도 ‘n번방’ 사건에 대한 사전 예방도 가능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은의 변호사는 “국회, 수사기관, 여성가족부에 국민이 바라는 것은 어떻게든 처벌하고 예방 대책을 만들어 달라는 건데 국회는 마치 ‘박근혜식 화법’으로 ‘내가 너희를 다 이해한다, 이건 다 없어져야 한다’는 투로 말하고 있다. 그걸 누가 모르느냐”고 꼬집었다. 이번에 내놓은 법안과 관련해서도 “문제의 핵심일 수 있는 ‘성착취’에 대한 개념도 없다”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성착취로 볼지에 대한 신중한 고민도 없이 나오는 대책들로 잠재적 피해자만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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