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두 얼굴로 가득 찬 악의 연대기[권상집 교수의 시사유감]
  • 권상집 동국대 경영학부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2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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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악마가 되길 선택한 조주빈과 익명의 존재들

2019년부터 수십 명의 여성을 협박해 입에 담기 어려운 성적 착취 영상을 찍어, 이를 거래하고 유포한 범죄자 조주빈의 모습이 드디어 공개됐다. 이미 그의 범죄 행각은 그해 9월부터 SNS를 통해 네티즌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고,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상당수 언론이 그를 비밀리에 쫓기 시작했다. 경찰에 붙잡힌 후 한 동안 범행을 부인한 그는 결국 언론사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의 행동을 ‘악마의 삶’이라고 정리했다. ‘n번방’에 모인 그들은 누구일까?

수많은 언론에서 이번 사건을 조명하며 ‘n번방’ 사건이라고 총칭해서 부르고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대중에게 알려진 사건은 크게 두 가지이다. 영상을 1번에서 8번까지 총 8개의 채팅 방에서 판매한 ‘n번방’ 사건과 입장 금액에 따라 채팅방 진입의 등급을 나눈 조주빈의 이른바 ‘박사방’으로 요약된다. 그와 채팅방에 모인 익명의 존재들은 언론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언론사를 겁박하고 조롱하는 모습을 서슴지 않았다.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있다. ⓒ고성준 기자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있다. ⓒ고성준 기자

대다수의 범죄자들은 언론의 취재가 진행되면 존재를 숨기려 든다. 거대권력인 기업들도 대부분 언론의 취재에 신중히 대응한다. 그러나 조주빈은 태연하게 언론사 취재진에 먼저 말을 걸었고, 인터넷을 통해 기자의 신상을 털었으며, 채팅방에 모인 익명의 참여자들에게 기자의 신상을 털면 더 많은 권한을 주겠다며 언론사를 상대로 공격 본능을 드러냈다. 취재를 맡은 일부 기자는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할 정도였다.

조주빈이 체포된 후 그의 두 얼굴에 대해 다양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3년간 50번 넘게 자원 봉사를 수행해왔으며 학내 성폭력 예방 기사를 쓰는 등 튀지 않고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카를 구스타프 융은 사람은 누구나 실제 모습을 보호하기 위해 가면을 쓴다고 강조해왔다. 가면 속의 모습과 일상의 모습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해왔다. 가면 안팎에서 조주빈은 천사와 악마의 경계선을 오갔다.

 

악마의 증식 소굴이 된 ‘n번방’과 ‘박사방’

현재 n번방으로 대표되는 성 착취 영상을 매수한 사람의 숫자는 무려 26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조주빈과 그의 일당들은 영상을 유포하고 거래하며 자신들의 채팅방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공범자로 탈바꿈시켰다. n번방에 참여한 다수의 인물들은 스스로 범죄에 가담하지 않고 방관만 했을 뿐이라고 변명할지 모른다. 잔인한 행동을 적극적으로 제재하지 않고 방관한 것도 피해자의 삶을 짓밟은 행위라는 점에서 이들의 신상은 공개돼야 마땅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해당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악을 의도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에도 악의 본질이 있기에 범죄자들은 항상 더 많은 사람을 현혹시켜 악의 소굴로 끌어들여 악행을 더 많이 공유하고 범죄에 대한 책임을 분산시키는데 주력한다고 아렌트는 설명했다. n번방, 박사방 등과 같은 텔레그램에서 은폐돼 진행되는 비밀방은 확인된 것만 100개가 넘는다. 단호한 대처가 필요한 부분이다.

n번방, 박사방은 온라인 세계에서 스스로 번식, 증식하며 채팅방에 들어온 회원들에게 등급을 부여하고 각 등급별로 권한을 위임, 분업화 과정을 통해 모든 사람을 범죄의 소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시켰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될 수 있는 한 책임 소재가 모호하도록 책임과 역할을 분산시키는 것이 악의 평범성을 극대화시킨다는 점에서 조주빈과 아직 체포되지 않은 n번방의 개설자 ‘갓갓’은 우리 주변에 가면을 쓴 악랄한 범죄자임에 틀림없다.

 

단호한 대처와 무관용이 필요한 이유

해마다 성적 착취와 관련된 노골적 범죄가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는 이들 범죄에 대해 늘 유약한 처벌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초 버닝썬에서의 일탈과 타락이 언론에 의해 전모가 공개됐고 그 안에서 조직적으로 여성을 강간하고 촬영, 공유하는 등 불법이 저질러졌지만 버닝썬 논란의 주범은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다. 또한, 버닝썬의 뒤에서 실제 몸통 역할을 해온 인물에 대한 조사나 검토는 결국 흐지부지되며 수면 아래로 사건은 사라졌다.

클럽에서 암암리에 자행되던 성적 착취는 온라인 세계에서 더 많이 증식되며 결국 26만 명에 해당되는 공범을 양산시켰다. 26만 명은 국내 지방 도시 전체 인구에 버금가는 숫자다. 이들은 태연하게 미성년자의 성 착취 영상을 수십만~수백만원을 지불하며 쾌락을 추구했다. 이렇게 집단적 성 착취 범죄가 늘 되풀이되는 이유는 그간 집단 성범죄에 대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 끝까지 추적해 검거하겠다는 경찰 및 검찰의 태도가 허언에 그쳤기 때문이다.

성범죄의 진원지였던 소라넷 운영자 중 절반은 여전히 체포되지 않은 상황이며 2년 전 양진호 위디스크 회장 사건 때에도 성 착취 영상으로 돈을 번 촬영물 소지자, 구매자에 대한 국민적 처벌 요구가 치솟았으나 국회에서 관련 법안 개정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버닝썬은 어떤가. 두 차례 구속 영장을 피한 승리는 군에 입대하며 사건은 유야무야 됐고, 성접대 등 논란의 중심에 선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은 무혐의 처리로 수사가 종결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장자연, 김학의, 버닝썬 사건에 이어 이번에도 n번방 범죄에 대한 특별 지시를 내렸다. 성범죄에 관해 단호히 그리고 엄중 처벌하겠다는 원칙을 강조했지만 지금까지 우리의 기억을 되돌려 보면 여성을 집단으로 농락한 범죄에 대해서는 유독 관대한 처벌이 내려졌다. 결국 성 착취 범죄자들은 독버섯처럼 늘어나며 악의 연대기를 구축해 나갔다. 단호한 처벌과 응징만이 익명 뒤에 숨은 독버섯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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