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물은 없다, 성착취물이 있을 뿐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4.04 17:00
  • 호수 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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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과 언론부터 말 조심해야

집단 성착취 영상거래방 또는 조직 강간 범죄 모의 및 실행방. 어디를 말하는지 아실 것이다. 이 텔레그램 대화방을 그들은 왜 “성범죄 저지르는 방”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고, n번방이라 했을까. 그들은 왜 “손쉽게 악마 되는 방”이라 부르지 않고 박사방이라 했을까. 그 방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영상을 그들은 무엇이라 불렀을까. 모르긴 해도 ‘야동’ 또는 ‘음란물’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이 방을 추적해 온 한겨레는 시종일관 “성착취물” 또는 “성착취 영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대다수 언론이 한겨레를 따라 “성착취물”이라고 쓴다. 그런데 음란방 또는 음란물이라는 용어를 쓰는 곳도 보기 드물지 않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는 지난 1월에 “텔레그램 음란방” “불법 음란물 유통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지난주 시사저널 칼럼에서도 “성착취 음란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법률에서도 비슷하다. 소위 ‘n번방 3법’으로 불리는 백혜련 의원 대표발의 법안을 비롯한 대다수 법안은 제안 이유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또는 불법촬영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 개정을 촉구하는 송희경 의원 대표발의 법안은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 범죄”의 형량을 높이자는 제안이다. 이렇게 동일한 사안을 두고 이름이 엇갈린다.

ⓒ일러스트 신춘성
ⓒ일러스트 신춘성

‘음란물’이 아닌 ‘성착취물’이다

누구는 성착취라고 말하고 누구는 음란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법률에 음란물이라고 돼 있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물론 법에서 말하는 음란물이란 말은 금지된 성적 표현물이라는 뜻이다. 법적으로는 음란물은 모두 불법이다. 그런데 왜 심지어 언론매체조차도 굳이 ‘불법’ 음란물이라고 표기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음란물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말할까.

궁금해서 찾아보아도 음란이라는 말의 정확한 정의를 알기가 어려웠다. 강준만 교수는 교양언어사전 ‘음란’ 항목에서,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새우리말큰사전’을 찾아보다 웃고 말았다. ‘음란하고 난잡함’이라는 정의가 내려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썼는데, 나도 웃고 말았다.

답은 권명아 교수의 말에서 나왔다. 《음란과 혁명》의 저자인 권명아 교수는 ‘음란은 개념이 아니라, 풍속 통제라는 분류장치가 생산한 분류 태그 같은 것’이라고 페이스북에 썼다. 풍속 통제란 아주 쉽게 말하면 풍기문란을 단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풍기문란은 또 뭘까. 미니스커트와 장발 단속?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이 풍속 통제 법률들은 얼핏 보기엔 문란한 생활습관을 방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지배층의 문화를 합리화하고 사회적 약자를 불량하거나 문란한 존재로 딱지 붙이는 데 기여한다.

더 쉽게 말하면 온갖 사회적 일탈을 모두 약자, 여성들의 잘못으로 돌리는 메커니즘이다. 그러므로 음란물이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피해자는 풍속을 직접 훼손한 사람, 즉 음란을 행한 행위자가 된다. 일탈계가 거론되고 위안부를 자발적이라 불렀던 학자가 딸 단속을 이야기하는 사고방식이 바로 이거다. 권 교수는 아직도 우리 사회와 법체계를 지배하는 풍속 통제를 똑바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코로나19가 자본주의를 전면 반성할 계기를 주듯이, 이제는 우리 사회 지배적 사고방식에 내포된 풍속 통제를 혁파해야 할 때가 왔다. 아청법상의 아동·청소년 음란물이라는 이름부터 고쳐보자.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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