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오너 일가들, 코로나19 틈타 자사주 쇼핑 나섰다
  • 송응철 기자 (sec@sisajournal.com)
  • 승인 2020.04.09 10:00
  • 호수 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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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경영’ 주장 펼치지만 “승계 작업 일환” 지적도

코로나19 사태로 증시가 급락한 올해 2월과 3월, 재벌 오너 일가의 자사주 매입이 잇따랐다. 이들이 내세운 자사주 매입 배경은 ‘책임경영’과 ‘주주가치 제고’다. 그러나 일각에선 이를 승계 작업의 일환으로 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경영권 확보를 위한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가가 낮아진 상황에서 자사주 매입에 나섰다는 것이다. 자사주 매입 주체 대부분이 승계를 앞두고 있고, 이들이 사들인 주식이 공통적으로 경영권 확보의 핵심이 되는 계열사라는 이유에서다.

왼쪽부터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김남구 한국금융지주 회장, 정유경 신세계백화점 총괄사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시사저널 최준필·사진공동취재단
왼쪽부터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김남구 한국금융지주 회장, 정유경 신세계백화점 총괄사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시사저널 최준필·사진공동취재단

내로라할 재벌가 3·4세 주식 매입

우선 삼성·현대·LG·롯데 등 국내에서 내로라할 재벌가 3·4세들은 빠짐없이 ‘자사주 쇼핑’에 나섰다. 이들 중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건 범(汎)삼성가(家) 3세인 정유경 신세계백화점 총괄사장이다. 그는 코로나 사태로 주가가 막 하락세에 접어든 올해 1월28일부터 3일에 걸쳐 신세계 주식 5만 주를 장내 매수했다. 주당 평균 매입가는 27만4395원으로, 전체 거래 규모는 137억원이었다. 이를 통해 정 총괄사장의 신세계 지분율은 9.83%에서 10.34%로 늘어났다. 정 총괄사장이 신세계 지분을 확보한 건 2016년 오빠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이마트, 신세계 지분을 맞교환한 이후 4년여 만이다.

투자액 면에선 현대가의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단연 눈에 띄었다. 그는 코로나 사태 이후 자사주를 매입한 재벌가 오너 중 가장 큰 비용을 투입했다. 정 수석부회장이 올해 3월19일에서 25일까지 5거래일간 현대차 주식 58만1333주(405억7000만원)와 현대모비스 주식 30만3759주(411억원)를 장내 매수하는 데 사용한 비용은 817억원에 달한다. 정 수석부회장의 자사주 매입도 2015년 현대차 주식을 매수한 이후 햇수로 5년 만이다. 또 범현대가로 분류되는 HDC그룹에서는 정몽규 HDC그룹 회장의 장남 준선씨와 차남 원선씨가 3월2일에서 4일 사이 HDC(주) 주식을 각각 3만 주와 4만 주 매입했다.

LG가의 경우는 자사주 매입에 나선 이의 수가 가장 많았다. 범LG가로 분류되는 GS가에서 자사주를 매입한 건 3세인 허태수 GS그룹 회장(8만5608주)을 제외하고 모두 4세였다.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의 장남 허세홍 GS칼텍스 사장은 2월5일부터 3월4일까지 (주)GS 주식 44만1110주(약 190억원)를 매입해 지분율이 1.51%에서 1.98%로 늘었다.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의 장남 허서홍 GS에너지 전무도 올해 2월과 3월 각각 4만7100주와 3만2000주의 (주)GS 주식을 매입해 지분율을 1.72%까지 끌어올렸다.

또 허남각 삼양통상 회장의 아들인 허준홍 대표는 2월 두 차례에 걸쳐 (주)GS 주식 10만 주를 확보해 지분율이 2.24%로 상승했다. 이 밖에도 GS가에서는 허경수 코스모그룹 회장의 아들 허선홍씨(2만5000주)와 허연수 GS리테일 부회장의 자녀인 허원홍씨(1만4000주), 허용수 GS에너지 사장의 차남 허정홍씨(7만8155주) 등 4세들이 대거 자사주 매입에 나섰다.

또 다른 범LG가인 LS그룹 3·4세도 다수가 자사주 매입에 나섰다. 우선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의 장남 구자은 LS엠트론 회장은 올해 3월 4차례에 걸쳐 (주)LS 주식 8325주를 매입해 지분율을 4.10%로 늘렸고, 같은 달 구자열 회장의 장남 구동휘 LS 전무도 (주)LS 주식 7600주를 매입했다. 또 고(故) 구자명 LS니꼬동제련 회장의 장남 구본혁 예스코홀딩스 부사장은 같은 시기 (주)LS 주식 1만2000주와 예스코홀딩스 주식 4530주를 매수했다.

롯데가에선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롯데지주 주식 4만7400주를 장내에서 매수했다. 주당 취득단가는 2만1052원으로 약 10억원을 주식 매입에 투입했다. 이번 주식 매입으로 신 회장의 지분율은 11.67%까지 늘어났다. 다만 신 회장의 경우는 이미 승계를 마무리하고 그룹 지배력 확보를 위한 지분 확보도 완료한 상태라는 점에서 다른 재벌가 3·4세들과는 구분된다.

코로나19 사태로 증시가 급락하자 재벌 오너 일가 3·4세들은 연이어 자사주 매입에 나섰다. ⓒ연합뉴스
코로나19 사태로 증시가 급락하자 재벌 오너 일가 3·4세들은 연이어 자사주 매입에 나섰다. ⓒ연합뉴스

증권사 오너들, 위기를 기회로

증권사 오너 일가도 코로나 사태로 인한 주식시장의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김남구 한국금융지주 회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3월23일과 24일 장내에서 26만6000주를 매입했다. 주당 평균 매입가가 3만2675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거래 규모는 약 87억원으로 추산된다. 김 회장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도 자사주를 대량 매수해 큰 이익을 본 경험이 있다.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은 이번 주가 하락을 증여 기회로 활용했다. 그가 보유한 다우데이타 주식 1556만6105주 중 94만 주를 장남인 김동준 키움인베스트먼트 대표가 최대주주(33.13%)인 이머니에 시간외매매로 약 49억원에 매각한 것이다. 다우데이타는 그룹 지배구조의 최상위에 있는 계열사다. 이머니는 또 장내에서 다우데이터 주식 7억6500만원어치를 추가로 매수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이머니의 다우데이터 지분율은 2.89% 증가한 25.16%가 됐다.

양홍석 대신증권 사장도 올해 1월부터 3월11일까지 23번에 걸쳐 장내 매수를 통해 대신증권 주식을 취득했다. 코로나 사태가 본격화된 2월과 3월 사이 매입한 주식만 31만1667주에 달한다. 이를 통해 양 사장의 지분율은 지난해 말 7.79%에서 최근 8.28%까지 늘었다. 양 사장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주식 매입에 나선 건 대신증권 오너 일가의 지분율이 낮아 경영권 방어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것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견기업 오너 일가도 자사주 매입 행렬에 동참했다. 이순형 세아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주성 세아제강 부사장은 3월 세아제강지주 주식 5834주를, 홍영철 고려제강 회장의 장남 홍석표 고려제강 부사장도 고려제강 주식 10만6320주를 장내 매수했다. 같은 달 박순석 신안그룹 회장의 장남 박훈 휴스틸 대표와 동화약품 4세인 윤인호 동화약품 전무도 각각 1만1108주와 3만9325주를 사들였다. 또 박진선 샘표식품 사장의 장남 박용학 샘표(주) 상무도 3월 샘표(주) 주식 5만306주를, 지난해 갓 경영수업을 시작한 전인장 삼양식품 회장의 장남 병우씨는 같은 기간 삼양식품 주식 2350주를 매입했다.

 

저가 매수 통해 오너 일가가 누릴 이익은?

기업들이 밝히는 오너 일가의 자사주 매입 배경은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책임경영’과 ‘주주가치 제고’가 그것이다. 실제 오너 일가의 자사주 매입은 주주 및 투자자들에게 호재로 받아들여진다. 그룹 경영실적에 대한 자신감 표출로 해석돼 주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시중에 유통되는 주식 수가 줄어 주가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실제 오너 일가가 지분을 매입한 기업들의 주가는 대부분 상승하는 추이를 보였다.

다만 일각에선 이번 오너 일가의 자사주 매입을 경영권 승계와 연관 짓는 시선도 적지 않다. 승계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가가 낮아진 상황에서 주식을 매입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자사주 매입에 나선 이들 대다수가 승계를 앞두고 있다는 점, 경영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계열사의 지분만 선별적으로 매입했다는 점 등을 두고서다. 그러나 해당 기업들은 이런 해석이 불편한 눈치다. 기업들은 일제히 오너 일가의 자사주 매입이 승계 작업과는 전혀 무관하다며 선을 긋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 자사주를 매입한 기업 오너 일가는 향후 얼마만큼의 이익을 누리게 될까.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경우를 보면, 그가 최근 매입한 현대차 주식을 올해 최고점(2월12일·13만7500원)에 거래했다고 가정했을 때 드는 비용은 약 799억원이고, 현대모비스(1월8일·25만6500원)는 약 779억원이다. 총 1579억원이 필요한 셈이다.

이는 정 수석부회장이 이번 자사주 매입에 투입한 자금(817억원)의 두 배에 가까운 규모다. 향후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고 주가가 제자리를 찾을 경우 막대한 평가차익을 누릴 수 있음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정 수석부회장의 경우 자사주를 매입한 지 1주일 만에 184억원의 평가차익이 발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기업 오너 일가도 다르지 않다. 김남구 회장의 한국금융지주 주식 평균 매입가(3만2675원)도 올해 최고점(1월22일·7만5800원)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고, 신동빈 회장의 롯데지주 평균 주식 매입가(2만1052원)도 최고가(1월20일·4만2800원)의 50% 미만이었다. 김동준 대표의 다우데이타 주식 매입가는 최고점 대비 60% 수준이었다. 다만 정유경 총괄사장과 허세홍 사장의 자사주 매입가는 최고가 대비 각각 82%와 83%로 다소 높은 가격에 거래가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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