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사고와 세계관을 지배하는가 [로버트 파우저의 언어의 역사]
  •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교수(《외국어 전파담》 저자) (jongseop1@naver.com)
  • 승인 2020.04.12 12:00
  • 호수 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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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지배하기보다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영향 커

언어학자 사이에는 ‘칵테일 파티 언어학’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모임에서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나눌 때 언어학자라는 소개를 들은 상대방의 반응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언어학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경우가 가장 많고, 어디선가 들었을 법한 언어와 관련한 통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경우도 있다. 그런 통설 중에는 ‘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그의 사고와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지배까지 한다는데 그게 정말이냐’는 것이 빠지지 않는다. 언어학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라고 하는데, 20세기 후반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언어학 관련 대표 통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에드워드 사피어(Edward Sapir·1884~1939)와 벤저민 워프(Benjamin Lee Whorf·1897~1941)의 연구에서 임의로 만든 것이다.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가는 오래된 물음이다. 사진은 페테르 부뤼헐의 작품 ‘바벨탑’(1563년) ⓒWikimedia Commons 제공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가는 오래된 물음이다. 사진은 페테르 부뤼헐의 작품 ‘바벨탑’(1563년) ⓒWikimedia Commons 제공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사피어-워프 가설

예일대학교 인류학 교수이자, 20세기 전반 유명한 언어학자 중 한 명인 사피어는 미국 선주민 언어 연구의 선구자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1858~1942)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의 영향을 받아 선주민 언어 연구에 열심이었다. 그는 특히 문화와 언어의 관계, 언어의 세계관에 관심이 많았고 비교적 관점에서 선주민 언어를 연구했다.

예일대에서 사피어의 지도를 받아 문화와 언어의 세계관을 연구해 온 워프는 원래는 소방 엔지니어였다. 취미로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그중에서도 메소아메리카 언어에 흥미를 느낀 그는 언어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직장을 다니면서 사피어 밑에서 공부를 병행했다. 그는 1939년부터 선주민 언어 문법과 영어의 비교를 통해 언어가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주장하는 논문을 몇 편 내기도 했다. 1941년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연구 기록 등이 출간됐고, 1950년대 중반까지 워프의 연구 틀을 활용한 비교 언어 연구가 매우 활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언어가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워프의 주장은 한발 나아가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해석되곤 했다.

이러한 이론을 동사의 시제를 통해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한결 쉽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정류장에 가까워지는 버스를 향해, 아직 운행 중임에도 ‘버스가 왔다’고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하지만 영어에서는 정류장에 가까이 오는 과정이 아니라 거의 멈춘 상태일 때 비로소 과거형을 사용한다. 이를 두고 아직 운행 중인데도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한국인들이 시간을 다르게 본다고 주장할 수 있다. 같은 맥락의 예는 또 있다. 한국인들은 ‘우리’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를 통해 한국 사회가 개인주의보다는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들어 워프의 이론은 비판받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1960년대부터 언어 상대주의에 반하는 노엄 촘스키(Noam Chomsky·1928~)의 언어 보편주의론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워프 이론에 대한 비판은 더 힘을 얻었다. 언어 상대주의는 언어 간의 차이가 중요하고 그 차이 때문에 사고와 세계관이 다르다고 보지만, 언어 보편주의는 언어가 표면적으로 차이가 있어도 본질적으론 같기 때문에 사고와 세계관의 차이는 언어가 아니라 문화에서 나온다고 여긴다. 이러한 언어 보편주의는 촘스키의 보편 문법 이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언어가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학설을 주장한 에드워드 사피어 ⓒWikimedia Commons 제공
언어가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학설을 주장한 에드워드 사피어 ⓒWikimedia Commons 제공

문화적·사회적 차이는 대화 언어에서 강하게 드러나

그런데 1990년대 들어서면서, 오랜 세월 비판받아 온 워프의 이론이 다시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메소아메리카 언어에 대한 그의 연구가 재평가되면서 워프는 20세기 언어학 역사에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게 됐다. 이와 맞물려 언어가 사고와 세계관보다는 공간 또는 시간 같은 인지적 개념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젠더가 있는 스페인어와 독일어의 경우가 매우 흥미로운 사례로 등장했다. ‘다리(橋)’라는 단어는 스페인어(el puente)에서는 남성, 독일어(die Brcke)에서는 여성이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스페인어 모어 화자는 다리를 떠올리면 넓고 큰 이미지를 연상하지만, 독일어 모어 화자는 좁고 작은 이미지를 연상한다고 한다.

오늘날은 어떨까. 언어학계에서 사피어-워프 가설은 더 이상 연구 대상도 아니고 심지어 명칭도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외국어를 배우는 많은 사람은 언어의 차이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다. 외국어를 어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차이가 골치 아픈 일이지만, 외국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차이는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와 달리 언어의 보편성은 누구에게나 이해하기 어렵고 애매모호한 개념이다.

버스가 ‘왔다’, 또는 ‘우리’ 엄마 같은 한국어 표현은 영어와는 매우 달라 흥미롭지만, 이것은 언어가 그 언어 사용자의 사고를 지배하는 사례라기보다 그저 사소한 표현의 차이일 수도 있다. 버스가 아직 운행 중이냐, 멈춘 상태냐 하는 것은 타고 싶은 버스를 탈 수 있다는 것에 비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라는 용어의 잦은 사용은 언어의 특징을 반영한다기보다 공동체 의식이 강한 전통문화의 영향이 더 크기 때문으로 이해하는 게 적절하다. 모성의 사랑은 어디나 강하고, ‘우리 엄마’나 ‘my mother’는 그저 표면적 표현이 다를 뿐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은 여전히 언어의 차이가 매우 크다고 느낀다. 그 이유는 뭘까. 언어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 차이에서 비롯한다. 문화적·사회적 차이는 문법과 어휘보다 대화 속에 사용하는 전체적인 언어에서 더 강하게 드러난다. 실례가 되는 주제가 어떤 것일지, 이 자리에서는 어떤 질문이 가능한지의 차이가 오히려 언어보다 더 선명하다. 예를 들면 한국어는 호칭을 잘 써야 한다. 호칭 뒤에 ‘~님’을 붙이지 않으면 실례가 된다. 이에 비해 영어는 호칭이 간단하고, 따로 더 붙이는 게 없다. 그렇다고 이것을 두고 한국어가 영어보다 발달했다고 봐야 할까. 그저 사회적으로 세밀하게 호칭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뿐이다.

문화와 사회적 가치관이 달라지면 자연스럽게 언어도 변한다. 어린 시절 친구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반드시 Mr. 또는 Mrs.를 성 앞에 붙였다. 우리 집에 온 친구 역시 그랬다. 하지만 최근에는 호칭을 생략하고 성 대신에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간편하게 변화한 문화적·사회적 분위기가 언어에 영향을 미친 셈이다. 사피어-워프 가설은 역사 속으로 이미 사라졌지만 언어와 문화적·사회적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높다. 그 때문에 나는 여전히 ‘칵테일 파티’에서 같은 질문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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