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물단지 사내유보금, 코로나 극복의 열쇠 되다
  • 김도현 시사저널e.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0.04.16 10:00
  • 호수 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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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신용도 낮아져 차입도 힘든 게 현실…사내유보금 쌓아둔 기업의 경쟁력 부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생존을 위한 기업들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전반적인 경제활동이 둔화되고 수요도 급감하고 있다. 위기를 넘어 존폐의 기로에 기업들이 내몰리는 상황이다. 유동성이 악화되는 기업 또한 속출하고 있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을 받던 기업의 ‘사내유보금’이 코로나 사태 이후 총체적 위기를 버틸 수 있는 원동력으로 주목받는 이유다.

사내유보금은 정식 회계용어가 아니다. 기업이 사용하지 않고 남겨놓은 ‘자본잉여금’과 순이익 중 주주배당 등을 통해 분배 과정을 거친 후의 ‘이익잉여금’ 등을 통칭해 편의상 사내유보금이라 부른다. 회계학에서도 이들 두 개념은 철저히 구분해 설명한다. 다시 말해 사내유보금은 자본금과 순이익 중 일부며, 사업활동을 위해 비축한 ‘잔고’라 볼 수 있다.

2014년 9월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가재정연구포럼 주최로 열린 ‘기업 사내유보금 과세의 바람직한 방향’ 토론회에서 패널들이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4년 9월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가재정연구포럼 주최로 열린 ‘기업 사내유보금 과세의 바람직한 방향’ 토론회에서 패널들이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왜 현금 쌓아두느냐” 비판하더니…

비판은 여기서 시작됐다. 이 잔고가 ‘여윳돈’으로 잘못 인식됐기 때문이다. 부(富)의 재분배 과정에서 기업이 이를 환원하지 않고 쌓아두기만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를 또 정치권이 교묘히 이용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경제정책의 근간이었던 ‘낙수효과’를 비판하는 데 이 사내유보금을 예시로 들었다. 낙수효과는 한계를 드러내며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기업의 사내유보금은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져 현재까지 방치됐던 것이 사실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치권에서 낙수효과의 효용성을 쟁점화하는 과정에서 사내유보금을 도구화하면서 주목받게 됐다. 기업이 나름의 계획을 갖고 현금을 쌓아두는 것이 논란이 될 문제인지 의문”이라면서 “보다 높은 배당수익을 올리고 싶은 주주들도 당장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유보금을 유지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사실 기업들은 사내유보금 관련 지적이 나올 때마다 “비상상황이 닥쳤을 때 회사를 지킬 수 있는 여력이자, 미래에 대대적인 투자를 위해 아껴놓은 종잣돈”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미 정치적 프레임에 갇혀 있던 까닭에, 당시에는 힘이 실릴 수 없는 해명이었다. 수년이 지나고,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당시의 해명이 현실화하고 있다.

현재 코로나19 감염자 발생 국가가 200개국을 넘어선 상태다. 전 세계 경제나 사회가 코로나19로 홍역을 앓고 있다. 한국은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직격탄을 맞은 국가였다. 다른 국가들의 기업보다 선제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수출 중심 구조인 탓에, 바이러스가 동남아·북미·유럽 등으로 확산되면서 국내에 집중됐던 피해는 점차 해외 사업장과 생산라인까지 번졌다.

국내외 신용평가사들은 한국 기업들의 신용등급을 잇따라 강등시켰다.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엄습할 것이란 불안감에 대한 일종의 전조현상이었다. 내수침체로 롯데·신세계 등 유통 대기업은 물론이고, 북미·유럽·중국 등 3대 시장에서 판매부진과 생산차질을 빚고 있는 현대자동차그룹, 코로나19뿐 아니라 유가 폭락까지 더해져 어려움을 겪는 LG화학·롯데케미칼·SK이노베이션·GS칼텍스 등 정유·화학업체들의 평가도 하향 조정됐다.

여기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현대차·기아차 등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에 대한 평가였다. 복수의 평가사들은 12조원을 웃도는 현금보유고를 이유로 “상당기간 위기를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내유보금을 비롯한 현금 보유능력이 경쟁력으로 평가받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용등급이 하락할 경우 회사채 발행 등 자금조달이 어려워진다.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국내 기업들의 자금조달 능력이 갈수록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 비용절감 노력이 수반된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고정비용 지출은 불가피하다. 자연히 언제 종식될지 모르는 바이러스 여파 속에서, 개별 기업이 보유한 현금은 위기 상황에서 기업의 영속을 위한 든든한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실제 기업들도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활용하고 있다. 수익성이 낮은 사업을 정리하거나 부동산 등 자산을 매각해 현금보유고를 높이려는 추세다. 개별 기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사내 정치적 이해관계 및 사업구조 개편 등이 얽혀 있기도 하지만 ‘위기 극복을 위한 현금 확보’라는 공통분모를 지녔음이 분명한 행보들이다.

코로나19로 전례 없는 항공수요 감소를 맞게 된 한진그룹은 한옥호텔 건립을 추진하던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와 인천 왕산마리나 부지 매각을 계획 중이다. 3월27일 한진칼 주주총회에 모습을 드러낸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도 “자본 확충을 바탕으로 회사 체질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겠다”며 이번 매각계획에 대한 의중을 밝히기도 했다.

 

CJ그룹, 필동 CJ인재원마저 매각

신세계그룹은 스타필드 건립이 추진되던 서울 강서구 마곡부지를 8158억원에 매각했다. LG그룹은 중국 베이징트윈타워 매각을 확정했으며, CJ그룹은 서울 강서구 가양동과 영등포공장 부지를 각각 1조500억원, 2300억원에 매각했다. 특히 CJ그룹은 그룹 내에서 상징성이 높은 서울 중구 필동 ‘CJ인재원’마저도 520억원에 매각을 단행했다. 이곳은 고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이 손복남 CJ 고문, 이재현 CJ그룹 회장,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등과 기거하던 자리다.

이 밖에도 현대차그룹이 추가적인 현금 확보를 위해 각 계열사에 현금유동성을 끌어올릴 것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사업구조 개편에 따른 자산매각, 기업어음·전환사채 등의 발행이 이뤄지고 있다. 태양광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들도 국내 폴리실리콘 생산을 중단했다. 기존 자산을 담보로 은행권에서 대출을 받아 현금보유고를 높이는 사례도 대폭 증가했다는 후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사업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위기에 끊임없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위기는 이번 코로나19 사태와 같이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면서 “특정 사업·업종·기업에만 들이닥친 위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각 기업의 사내유보금은 생존력을 높이는 주효한 밑거름으로, 당초 취지에 걸맞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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