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허덕이는 프랑스 “응급실이 응급 상황이다”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4.10 15:00
  • 호수 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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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드러난 프랑스의 부실한 공공의료…재정 안정 위해 응급실 줄여

“프랑스 공립병원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프랑스 내 유력한 응급의료학 교수 프레데릭 아드네의 말이다. 이 발언은 현재 지구촌을 뒤덮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를 두고 한 말이 아니다. 4개월 전인 지난해 11월14일, 프랑스 공공의료부문 대규모 파업을 두고 한 발언이다. 유럽 대륙에 상륙한 코로나19 사태 앞에 프랑스 공공의료 시스템이 전대미문의 시험대에 올랐다. 더구나 프랑스의 공공의료기관, 특히 국공립병원 응급실들의 상태는 이미 이전부터 ‘번아웃’ 직전의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뛰어난 대처로 세계적으로 호평받고 있는 한국이나, 4월8일 ‘우한 봉쇄 해제’를 선언한 중국조차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엄중한 지금, 이미 고질적 병폐로 바람 잘 날 없었던 프랑스 공공의료 시스템은 더욱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지난해, 6개월여 동안 이어졌던 프랑스 국공립병원 응급실 의료진의 시위 구호는 “응급실이 응급 상황이다”였다. 이 상황에서 조금도 개선되지 않은 채 프랑스는 코로나19 대유행을 막아내야 하는 최전선에 서게 된 것이다. 2017년 5월 취임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이듬해 9월, 프랑스 의료정책에 대한 개편 정책을 발표했다. 2022년까지 공공의료 시스템 정비에 무려 34억 유로(약 4조5000억원)를 투자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의료진 부재로 불편을 겪는 지방병원 인력 확충부터 응급의료 시스템 과부하를 해결하기 위해 1차 진료를 일반 의료체계로 돌리는 체질 개선 작업까지, 마크롱은 “향후 50년을 바라보며 프랑스 의료체계를 개선해 나갈 것”이라는 포부를 아낌없이 드러냈다.

4월1일(현지시간) 프랑스 의료진이 파리 오스텔리츠역에서 코로나19 환자를 다른 도시 병원으로 이송하려 TGV 고속열차에 태우고 있다. ⓒEPA연합
4월1일(현지시간) 프랑스 의료진이 파리 오스텔리츠역에서 코로나19 환자를 다른 도시 병원으로 이송하려 TGV 고속열차에 태우고 있다. ⓒEPA연합

의료현장에 닿지 못하는 정부의 의료정책

그러나 개혁안 발표 불과 6개월 후인 2019년 3월 파리 생앙투완 병원에서 파업이 시작됐다. 발단은 병원 응급실 의료진이 환자로부터 폭행을 당한 사건이었다. 평균 4시간 이상의 기나긴 대기 시간에 날카로워진 환자가 의료진을 폭행하자, 그동안 분노가 쌓여온 의료진이 폭발해 맞붙은 것이다. 파업은 이 병원에서 끝나지 않았다. 파리 주변 21곳의 공공병원 응급실이 이에 동참했으며, 2주 후엔 전국 병원 60여 곳으로 확대됐다. 지난해 7월 기준 전국 520곳의 공공병원 응급실 중 217곳이 파업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기도 했다. 보다 못한 프랑스 정부는 응급실 간호 인력에게 위험수당 100유로를 지원한다는 긴급 처방을 내놓았지만, 파업은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와 응급의료 시스템 종사자들의 갈등 지점은 간명하다. 응급실 인력 충원, 임금 인상, 그리고 병상 확대다. 이에 대해 프랑스 시사주간지 오피니언은 “정부는 정확히 이 3가지 요구사항을 뺀 개혁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향후 2022년까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다고는 하지만, 그 돈이 당장 다급한 공공의료기관 응급실에 직접적·효과적으로 ‘수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규 인력 확충 계획도 교육이나 새로운 시스템을 위한 의료 시스템 전체를 아우르는 채용이다. 유럽 조르주퐁피두 병원 응급 서비스 책임자인 필립 주방은 “외과 수술적인 세밀한 ‘핀셋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응급실을 비롯한 ‘병상 확충’ 문제는 국립병원의 재정 상태와도 직결된다. 현재 프랑스 주요 국공립병원이 안고 있는 문제는 단연 ‘재정 건전성’이다. 병원마다 적자를 개선하기 위해 응급실 등의 병상을 줄여 나가는 일을 ‘고육지책’으로 쓰고 있다. 현재 프랑스 인구 1000명당 병상 수는 6개로, 이웃 국가인 독일의 8개보다 약간 낮다. 반면에 ‘집중치료’가 가능한 병상 수는 인구 1000명당 3.09개로 6.02개인 독일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공공의료에 대한 투자 역시 국민총생산 대비 11.2%로 독일과 수치상으로는 같지만, 독일의 총생산 비중이 프랑스보다 우위임을 감안한다면 공공의료 지출 절대치는 독일에 비해 낮은 셈이다. 파리 살페트리에 병원의 앙드레 그리말디 교수는 “병원은 기업이 됐고 의사는 사업가가 됐다”고 성토하며 “의료진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정치인들의 입바른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이동 제한령이 내려진 후 프랑스 시민들은 긴급한 식료품을 사거나 의사를 만나러 가는 등을 제외하면 이동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연합뉴스
이동 제한령이 내려진 후 프랑스 시민들은 긴급한 식료품을 사거나 의사를 만나러 가는 등을 제외하면 이동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연합뉴스

봄 날씨에 느슨해지는 외출 제한령

“바이러스에게 바캉스는 없다.” 4월4일 부활절 방학 시작을 앞두고 프랑스 정부가 내건 슬로건이다. 현재 프랑스 정부가 사활을 걸고 있는 유일한 수단은 ‘이동 제한’을 통한 전파 억제뿐이다. 방역 및 의료 관련 전문가들은 한국의 사례를 끊임없이 꺼내며 ‘대규모 검사’와 ‘확진자 추적’을 조언하고 있다. 그러나 진단키트와 같은 검사장비도 턱없이 부족하고, 당장 대규모 확진자가 발생할 경우 이를 떠맡을 수 있는 시스템조차 부재한 상태다. 확진자 추적 역시 개인의 자유에 유난히 민감한 프랑스 국민 정서 탓에 마크롱 정부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일한 해결책으로 ‘이동 제한’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섭씨 20도를 웃도는 따뜻한 기온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프랑스 국민의 경각심을 날로 흐리고 있다. 이에 감염학 전문의이자 과학자문위원회 장프랑수아 델프레시 회장은 “‘이동 제한령’을 지키지 않는 건 ‘집단자살’”이라며 엄중히 경고하기도 했다.

현재 프랑스 정부와 시민들이 ‘이동 제한’에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환자의 격리’를 의미하는 ‘콩핀망(confinement)’이다. ‘이동 제한령 해제’는 ‘데콩핀망(dconfinement)’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프랑스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탈하다’는 의미의 접두사인 ‘d’를 붙여 신조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사태는 프랑스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낯설고 돌발적인 사태인 셈이다.

이처럼 한 번도 겪지 못한 초유의 사태로 인해 프랑스 국민은 당연했던 생활방식에 막대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프랑스식 인사법인 ‘볼 입맞춤’이 사태 초기부터 제한됐으며. 이동 제한령의 강화로 산책이 일상인 파리 시민들의 낮 시간(오전 10시~오후 7시) 야외 운동이 엄격히 금지됐다. 실제 해당 조치 후 파리 시내에 가장 눈에 띄게 늘어난 건 낮 시간을 피해 아침 일찍 조깅을 하는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맑아진 날씨에 운동을 핑계 삼아 거리로 나서려는 파리 시민들과, 이를 막기 위한 파리시의 신경전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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