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들은 왜 아직 ‘우한 폐렴’이라 할까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0.04.15 10:00
  • 호수 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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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논란 속 사라진 용어…일부 대기업 여전히 대외용 자료에 기재해 논란

“‘우한 폐렴’으로 불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로 확산되면서 대내외 시장에 타격을 미치고 있다.” “우한 폐렴 사태의 경과 등 불확실성이 드러나 있다.”

일부 대기업이 사업보고서나 투자설명서 등 회사 공식 자료에서 아직까지 우한 폐렴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우한 폐렴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질병 명칭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또 다른 표현이다.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일각에서 쓰였던 말로, 지금은 사장되다시피 했다. 특정 지역(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 대한 편견과 차별,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 등을 조장할 소지가 있다는 공감대에 따른 것이다. 

ⓒ일러스트 김세중
ⓒ일러스트 김세중

최근 공시에서 ‘우한 폐렴’이라 표현

그런데 시사저널이 확인한 결과 태영건설, 우리금융지주, GS E&R, GS EPS, 현대오일뱅크, SK 등 대기업이 최근 발표한 회사 자료에서 우한 폐렴이란 표현을 쓰고 있었다. 이 회사들 외엔 중소·중견·대기업을 막론하고 우한 폐렴 용어를 사용한 곳이 거의 없어 비교된다. 

태영건설은 4월3일 발표한 증권신고서와 예비투자설명서에 “최근에는 우한 폐렴으로 불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로 확산되면서 대내외 시장에 타격을 미치고 있다”고 기재했다. 계열사 태영인더스트리의 곡물 물류사업 전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다. 증권신고서는 투자자 보호와 건전한 자금 조달을 위해 증권거래법에 따라 유가증권과 회사의 현황을 설명해 놓은 서류다. 증권신고서 내용이 확정되면 동일한 내용이 투자설명서에 기재된다. 

우리금융지주는 3월30일 발표한 2019년도 사업보고서에서 자산운용업 부문과 관련해 “장기 저성장 국면이 지속되는 큰 흐름 가운데 미·중 무역 협상 진행, 미국 대선 향방, 우한 폐렴 사태의 경과 등 불확실성이 노정돼(드러나) 있다”고 밝혔다. 사업보고서란 당해 사업연도의 재무 상태와 경영 성과 등을 나타낸 자료다. 

GS그룹의 경우 발전(發電) 계열사 GS E&R과 GS EPS가 우한 폐렴 용어를 사용했다. GS E&R이 3월4일 공시한 투자설명서에는 “2020년 초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한 우한 폐렴에 대한 공포는 전 세계로 퍼지며 여행업을 비롯한 각종 산업의 위축을 일으키고 있다”고 적혀 있다. 같은 문구가 2월27일자 증권신고서에 먼저 기재됐다. 앞서 GS E&R의 증권신고서와 투자설명서 모두 ‘기재 정정’ 과정을 거쳤으나 우한 폐렴 용어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2월24일 발표된 GS EPS의 투자설명서엔 “2020년 초 확산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인 이른바 우한 폐렴 공포가 전 세계로 퍼지며 여행업 위축 등으로 원유 수요가 둔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유가는 점진적 하락세”라고 나와 있다. 역시 2월18일자 증권신고서에 같은 표현이 들어 있다.

이 밖에도 현대오일뱅크는 2월20일자 증권신고서와 2월26일자 투자설명서에서 “2020년 초 확산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인 이른바 우한 폐렴 공포”라고 표현했다. SK는 2월19일자 증권신고서, 2월20일자 투자설명서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인 우한 폐렴”이라고 적었다.

우한 폐렴 용어가 한 차례 논란에 휩싸인 후 2월 중순쯤부터는 거의 쓰이지 않아온 점을 고려하면 해당 기업들의 이 같은 행보는 의아하다는 평가다. 회사 이미지, 국내외 고객 여론 등에 민감한 대기업이 굳이 왜 오해를 살 수 있는 용어를 공식 문서에 사용했느냐는 것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증권신고서, 투자설명서 등 정례적인 자료는 기업설명(IR) 담당자 재량에 따라 작성되는 경우가 많다”며 “우한 폐렴 용어는 담당자가 별다른 의도 없이 그냥 썼거나 개인 성향에 따라 썼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3월 이후에도 쓴다는 건 오해 소지 충분”

그러나 공시 자료들에는 모두 담당 임원과 대표이사의 이름, 서명이 들어가 있다. 게다가 대표이사와 임원은 자료에 포함된 ‘확인서’를 통해 “우리는 당사의 대표이사 및 신고 업무 담당 임원으로서 문서의 기재 내용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다해 직접 확인·검토했다. 표시된 기재 또는 표시 사항을 이용하는 자의 중대한 오해를 유발하는 내용이 기재 또는 표시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한 투자자문사 대표는 “공시 내용을 실무 직원 마음대로 작성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면서 “투자자들을 위한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 면밀히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요즘 미국 등 해외의 금융 관련 자료나 언론 보도를 봐도 이번 질병을 놓고 우한, 중국 등 지역명을 덧붙이는 사례는 없다”며 “더군다나 국내에선 우한 폐렴 용어를 둘러싸고 정치적 논란까지 있었다. 1월 내지 2월까지는 몰라도 3월 이후에 우한 폐렴 용어를 쓴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는 지난해 말 중국 우한시에서 본격화했다. 한국은 1월3일 질병관리본부에서 ‘우한시 원인 불명 폐렴’이라는 용어를 쓰며 대책반을 꾸렸다. 당시 언론들은 우한 폐렴, 원인 불명 폐렴 등으로 표현했다. 그러다 1월12일 WHO가 집단 폐렴 원인을 밝혀내면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란 명칭을 쓰기 시작했다. 질본도 WHO의 지칭 방식을 따랐다. 1월13일 보도자료를 통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분석·검사법 개발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자연스레 대다수 언론, 일반 시민 등도 동참하게 됐다. 

논란은 1월27일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 브리핑 이후 불거졌다. 윤 수석은 브리핑에서 우한 폐렴과 코로나바이러스란 표현을 섞어 썼고, 이후 청와대가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출입기자단에 공식 명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임을 부연했다. 그러자 일부 언론은 청와대가 중국 정부를 의식해 우한 폐렴 용어를 못 쓰게 막는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보수정치권도 이런 주장에 동의하며 정부를 비판했다. 2월 중순쯤부터는 해당 논란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이라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며 우한 폐렴 용어도 거의 사라졌다는 점에서 뒷말이 나오고 있다. 

물론 공시 내용 감독 기관인 금융감독원도 우한 폐렴 용어 사용에 관해서는 별달리 할말이 없다는 입장이다. 4월 들어 처음 우한 폐렴 용어를 공시 자료에 포함한 태영건설 관계자는 “증권신고서 작성 작업을 지난 1월부터 시작했다. 질병을 지칭하는 용어가 바뀌는 과정에서 (담당자가) 자료에 우한 폐렴이라 기재한 것을 수정하지 못한 것 같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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