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美 학생 문학상 수상작…5·18 관련 詩 표절 들통
  • 공성윤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20.04.2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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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고교생 수상작 ‘MAY 1980’, 김남주 《학살2》와 66% 일치…"무심코 표절했다"

미국의 한인 학생이 고(故) 김남주 시인의 작품을 표절 번역해 다수 문학상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학생 측은 의혹을 시인했고, 해당 수상 소식을 다룬 기사와 사진 등은 온라인에서 삭제됐다. 

2018년 11월28일 A양의 고등학교 문학잡지 페이스북 페이지 올라온 수상 소식. 현재 게시물은 삭제된 상태다. ⓒ 페이스북 캡처
2018년 11월28일 A양의 고등학교 문학잡지 페이스북 페이지 올라온 수상 소식. 현재 게시물은 삭제된 상태다. ⓒ 페이스북 캡처

 

일리노이주 S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A양은 2018년 위스콘신대 화이트워터 캠퍼스에서 주최한 ‘크리에이티브 라이팅 페스티벌’에서 시 부문 1등상을 받았다. 수상작 제목은 ‘MAY 1980’이다. 이는 ‘민족시인’ 김남주 시인의 1987년작 《학살2》를 베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학살2》는 5·18 민주화 운동의 처참함을 묘사한 작품으로, 대표적인 민족 저항시로 불린다.

A양의 수상작은 “It was May 1980. It was a day in Gwangju. At midnight we saw the local police replaced by combat police”란 문구로 시작된다. 《학살2》의 첫 구절은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이다. 원문에서 일부를 빼고 그대로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A양의 수상작은 2012년 공개된 번역본과도 유사한 모습이 엿보인다. 당시 고(故) 송재평 미국 메리그로브대 교수와 남아공 출신 멜라니 스테인 작가는 《학살2》를 공동 번역한 작품 《Massacre, Part II》를 블로그에 발표했다. 

시사저널이 이 작품과 A양의 수상작을 버지니아대학에서 개발한 표절 검사 프로그램을 통해 비교해봤다. 그 결과 66%의 일치율을 보였다. 일부 단어는 유사어로 바뀌어 있었다. 예를 들어 《Massacre, Part II》는 원문의 ‘총검’을 ‘bayonets’로, ‘쑤셔놓은’을 ‘poke’로 직역했다. 반면 A양 수상작에선 각각 ‘rifles(소총)’, ‘jabbed(찔린)’으로 대체돼 있었다. 그 밖에 원문의 ‘무등산’ ‘영산강’은 두 작품에서 모두 ‘Mudeung Mountain’ ‘Youngsan River’로 번역돼 있었다. 

A양의 수상 소식은 2018년 11월 교내 문학잡지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서도 알려졌다. 여기엔 수상작 전문과 A양이 상장을 들고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해당 게시물은 현재 지워진 상태다. 

한편 A양은 같은 작품으로 2018년 ‘스콜라스틱 아트&라이팅 어워즈(SAWA)’에서 시 부문 은메달을 받기도 했다. 이 대회는 미국 전역에서 최대 규모의 예술 공모전으로 알려져 있다. 7~12학년(중2~고3에 해당)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데, 입상 경력은 미국 예술대 진학을 위한 ‘스펙’으로 통한다. 

A양은 해당 공모전에서 3년동안 총 금메달 1개, 은메달 3개를 땄다. 이 사실은 올 3월17일 A양 고등학교 교지에서 기사화됐다. 그러나 이 역시 삭제됐다. 단 공모전 홈페이지에는 수상 기록이 남아 있다. 

공모전을 주최하는 뉴욕 비영리재단 '얼라이언스 포 영 아티스트&라이터'는 가이드라인을 통해 “출품작이 표절 관련 참가 규정을 어겼다고 판단되면 실격 처리된다”고 밝히고 있다. 또 “(수상한 경우에는) 상을 회수한다”며 “규정 위반 작품이 전시될 경우 지원자와 주최측 모두 금전적 책임을 질 수 있다”고 했다. 

뉴욕주의 한 변호사는 “미국 학계에서 표절 문제는 중대하게 취급된다”며 “시의 표절 여부를 따질 때는 아이디어가 아닌 표현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A양의 수상작과 《학살2》《Massacre, Part II》를 보여주고 자문을 구했다. 변호사는 “표절 정황은 뚜렷해 보인다”며 “공모전 주최측이 A양의 작품을 번역물이 아닌 창작물로 간주해 상을 줬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카피라이트(copyright·저작권)와 관련해 법적 문제가 불거질 소지도 있다”고 덧붙였다. 

A양의 표절 의혹은 4월 중순 재미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 ‘미시USA’에서 처음 제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네티즌들은 A양 어머니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민주항쟁을 다룬 시가 추잡하게 소비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A양의 진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2003년 하버드대는 뉴저지주 고등학생의 신문 기고문에 표절 정황이 드러나 입학 허가를 취소한 적이 있다. 

A양 측은 표절을 인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위스콘신대 공모전 관리자 에린 셀렐로는 4월22일 시사저널의 이메일 질의에 "A양이 이번주에 '내가 문제의 그 시를 무심코 표절했다'고 알려왔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수상 목록에서 A양의 작품을 뺐다"고 덧붙였다. A양의 입장을 직접 듣고자 학교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냈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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