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만 보고도 온 국민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는다. 코로나19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활동이 줄어들면서 경제가 어려워졌으니까 국가가 재정을 풀어야 한다는 논의 속의 숫자들이다. 저 숫자들에 얼굴을 씌워보기로 했다. 먼저 100. 이것은 쉽다. 여기저기 살고 있는 한국 사람 아무나다. 이 100에 이주노동자들이나 좀 더 나아가 불법체류자를 끼워주자라는 말까지 갈 수 있다면 최상급의 숫자가 될 것이다. 국민들이 우리나라 땅에 살고 지금의 위기를 함께 감당하는 모든 이가 식구라고 생각한다면 가장 아름다운 수가 될 것이다.
100이 쉬운 만큼 70은 어렵다. 지금 이 시점에 30은 ‘이재용’들이 아니다. 경계선이 확고부동하지도 않다. 기준이 되는 시점에 30 이내이던 가족이 지금은 50 언저리에 가 있을 수도 있다. 100일 때 단순하던 숫자는 70이 되니까 복잡해진다. 복잡은 분열을 낳고 분열은 다툼을 낳는다. 결국 정말로 약한 사람들은 사라져버린다. 정치적 계산 말고 사람을 본다면, 이 선택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가 뭐겠는가. 누가 수를 고집하는가. 차별할 권리를 가지려고 애쓰지 말자.
국회는 세상 변화 민감하게 읽어내야
다음 1과 4를 보자. 100을 택하는데 100이 그냥 100이 아니라 4 단위로 나눠서 100이란다. 즉 4인 가족 기준으로 100만원.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할까. 뭐든 기준이 복잡하면 분배하는 사람의 권한이, 완장이 두터워지게 마련이다. 다른 문제도 있다. 이미 한국 사회는 4인 가족이 사회의 기준이 아닌 지 오래되었다. 아니 4인이고 3인이고 간에 이미 가족이 사회의 최소 단위가 아니다. 100과 1을 택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군림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재정 집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하다가 잘린 아들딸 있는 4인 가구는 그 100만원을 어떻게 분배하지? 분배에 따른 갈등을 가족 내에서 알아서 해결할 거라고?
하여간 돈을 나눠준다니까 한숨 돌리는 기분은 든다. 좀 더 본격적인 고민을 해야 할 때다. 왕정이 폐지된 다음 사람들이 왜 국가를 세웠을까. 한 울타리 안에서는 최소한 평등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잘 안되는 이 평등을 코로나19가 몰고 온 위기 앞에서 좀 더 민감하게 의식하게 하는 것이 저 숫자들이다. 70, 100, 4, 1. 이런 문제를 고민하라고 모인 사람들이 국회다. 국민의 대표라는 것이 별건가? 가장 민감하게 세상 변화를 읽어내는 사람이 대표다.
그러나 20대 국회는 심하게 말하면 국민 대표 노릇을 한 적이 거의 없다. 마지막 한 달 동안 밀린 숙제 하듯 몽땅 다 하고 가시라. 관료들에게 국민을 차별할 권리를 주지 말고, 성범죄자들에게 거리를 활보할 권리를 주지 말고.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마음으로, 가진 자가 아니라 국가가 보호해야 할 약자의 눈으로.
이를테면, 경제가 어렵다는 그 경제가 누구의 경제인가. 삼성이 수출 안될까 봐 걱정하는 일은 삼성한테 맡겨두시고, 그 삼성의 하도급, 재하도급 회사의 악 소리도 못 하고 밀려나는 노동자들의 경제부터 챙기면 좋겠다. 그 하도급·재하도급·재재하도급 일꾼들에 의지해 벌어먹고 살던 골목경제부터 챙기면 좋겠다. 엄마가 재택근무하는 바람에 벌써 넉 달째 ‘집에서 노는’ 가사도우미부터 바라보라. 제발 감정 좀 장착하시라. 누가 가장 아프고 슬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