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은 ‘김정은 후계자’로 굳어지나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4.24 15:00
  • 호수 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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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핵심 엘리트층 “모든 길은 여정 동지로 통한다” 입소문

‘김정은 유고설’이 지구촌을 뜨겁게 달궜다. 불과 열흘 남짓한 그의 공백에 국제사회의 시선이 온통 평양으로 쏠린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의 세계적 창궐로 북한 이슈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진 듯해 보이던 미국과 중국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건재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위시해 미국의 행정부와 군 당국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직접 나서 관련 정보에 대해 브리핑과 인터뷰를 하는 상황도 펼쳐졌다.

이런 국면은 김정은의 현재 위상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3대 세습과 폭압적 통치, 핵과 미사일을 통한 도발 행보 등 부정적 평가 속에서도 한반도 정세와 국제정치에서 그가 갖는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측면에서다.

이번 사태는 김정은 위원장이 그의 할아버지이자 선대 수령인 김일성(1994년 7월 사망)의 108회 생일 행사에 불참하면서 벌어졌다. 2012년 집권 후 해마다 빠지지 않고 4월15일 생일엔 김일성 시신이 미라 처리돼 안치 중인 금수산태양궁전을 당 간부들과 방문했다. 김정은의 경우 통치 기반을 다지기 위해 김일성의 카리스마와 통치 스타일을 벤치마킹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는 점에서 참배 행사 불참은 불충이나 불효로 지배 엘리트와 주민들에게 비쳐질 수 있는 부담이 따른다. 뭔가 탈이 났다는 판단이 가능한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19일 평양공동선언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19일 평양공동선언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연합뉴스

“김정은, 여정·정철과 정기적으로 통치 논의”

사태 초기 서울의 일부 탈북 인사와 전문가, 대북 전문매체의 김정은 신변 이상설 분석은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김 위원장이 평양을 찾은 외국 의료진으로부터 수술을 받았다는 미확인 보도가 올 초부터 나왔던 터라 건강 이상 등의 관측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앞서 김 위원장은 1월25일 설맞이 축하공연 관람 후 한동안 공개활동을 하지 않다가 2월16일 아버지인 김정일(2011년 12월 사망) 생일을 맞아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했다. 20일 넘게 공백을 보인 것이다. 지난해 5월에도 북한 매체는 20일 이상 김정은의 공개활동을 보도하지 않았던 바 있다. 

하지만 4월20일(현지시각) 미국 CNN이 “김정은이 수술 후 심각한 위험에 빠진 상태”라는 보도를 내놓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출처를 ‘이 사안을 잘 알고 있는 미국 관리’라고 밝혔다는 점에서 북한 최고지도자의 신상에 중대한 변고가 생긴 게 마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즉각 “우리는 모른다”고 말하면서 CNN 보도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내는 발언을 했지만, 사태는 잠잠해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와 청와대가 “김정은 신상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안다”는 입장을 내고 서울과 워싱턴을 중심으로 ‘통치 활동에 이상이 있는 정도는 아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CNN은 이후 단정적 보도의 톤을 낮추기는 했지만, 여진은 이어졌다. 

김정은 유고설을 둘러싼 혼선 속에서 주목받은 또 다른 인물은 여동생 김여정이다. 유사시 김정은 위원장을 대신해 북한 권력을 이끌어갈 0순위 지도자로 꼽힌 것이다. 특히 미국의 유력 매체와 전문가들은 정보 당국의 첩보 등을 근거로 현재 노동당 제1부부장을 맡고 있는 김여정이 대안으로 떠올랐다고 일제히 전하고 있다. 올해 36세인 김 위원장이 부인 리설주와의 사이에 세 자녀를 두고 있지만, 이들 모두 아직 열 살 안팎의 어린아이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목되는 건 북한 권력서열 2위로 간주되는 최룡해 국무위 제1부위원장이나 다른 군부 인사가 김정은 후계 세력으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최룡해를 주축으로, 혹은 군부 세력에 의한 집단지도 체제 가능성도 언급될 수 있지만 이번의 경우 좀체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진 3대 세습의 핵심은 김씨 일가를 일컫는 ‘백두혈통’의 계승이란 측면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북한의 논리를 토대로 할 때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후계자로 자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정보 당국도 일찌감치 김여정을 주목해 왔다. 지난해 6월에는 국회 정보위원회를 통해 “김여정이 지도자급으로 격상된 것으로 판단된다”는 국가정보원의 첩보가 대두했다. 당국이 이혜훈 당시 국회 정보위원장의 발언이 와전된 것이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우리 정부도 김여정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한 고위 관계자는 “김정은이 김여정과 형 김정철을 정기적으로 만나 북한 통치에 대해 논의를 한다는 첩보가 있다”고 귀띔했다. 물론 형 정철의 경우 호르몬계 질환 등으로 인해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 순위에서 동생인 김정은에게 밀려났다. 김여정이 사실상 유일한 혈통 내 후계자란 얘기다.

 

“김여정이 만리마 속도전 만들어” 자랑하기도

김여정의 경우 김정은 집권 3년 차인 2014년 권력 전면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해 3월 김정은을 수행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투표장에 나왔고, 투표함에 표결하는 장면이 TV로 중계됐다. 당시 ‘노동당 책임일꾼’으로만 불렸던 김여정은 11월 노동당 부부장으로 호칭됐다. 당시 25세 나이였다. 아버지인 김정일의 경우 28세인 1970년에 선동부 부부장이 됐고, 고모 김경희는 30세에 국제부 부부장에 올랐다는 점만 봐도 권력 등장을 서둘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김여정에 대한 오빠 김정은의 신임은 매우 두텁다.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과 환담하는 자리에서 “김여정 부부장 부서에서 ‘만리마 속도전’이란 말을 만들었다”며 자랑하듯 말하기도 했다. 당시 선전선동부 부부장(현재는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파악)을 맡아 사업을 만족스럽게 잘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김여정은 같은 해 2월 김정은 특사로 청와대를 방문해 문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했고,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다. 그해 4월과 5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9월 평양 정상회담에서도 오빠 김정은의 바로 곁을 지키거나 회담에 배석하는 등 비서실장 역할을 했다.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도 마찬가지다. 10월7일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환담하는 등 5시간30분의 일정을 소화할 때 김여정은 김정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앞서 5월 폼페이오 방북 때는 김정은에게 건네진 서한을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 넘겨받자 이를 김여정이 냉큼 채가듯 챙기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오빠와 관련한 중대 내용은 빠짐없이 장악하겠다는 김여정의 강한 의지가 엿보인 행동이다.

지금 평양 권력의 핵심층과 엘리트 관료 사이에서는 “모든 길은 여정 동지로 통한다”는 말이 번진다고 한다. 김정은 체제의 북한을 움직이는 조선노동당의 최고 요직인 조직지도부의 사실상 책임자를 맡아 당과 군부, 내각의 조직과 인사를 거머쥐고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 김여정이 2인자 혹은 후계자로 지나치게 부상할 경우 김정은 유일 지배 체제에 부담이 될 수 있고, 김여정 신상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스위스 유학을 함께한 데다 김정은이 ‘믿을 건 혈통뿐’이란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란 점에서 고모부 장성택 처형 때와는 상황이 다를 것이란 분석에 힘이 실린다. 오빠의 든든한 보좌관에서 권력 후계자로 떠오른 김여정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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