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의 시간》 넷플릭스행(行)의 역설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5.02 16:00
  • 호수 1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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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을 기다린 파수꾼의 후예들

영화 《파수꾼》처럼 밀도 높은 에너지의 데뷔작을 만든 감독은 어떤 차기작을 내놓을까. 그 궁금증이 풀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9년. 과정은 여러모로 험난했고, 이례적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극장 개봉 연기와, 넷플릭스행(行)을 둘러싼 투자배급사와 해외 세일즈사 사이의 법적 분쟁, 그로 인한 또 한 번의 공개 연기, 진통 끝 넷플릭스 공개 확정까지. ‘영화 한 편 보는 게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던가’라는 탄식이 뒤섞여 가뜩이나 기대작이었던 《사냥의 시간》을 향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가 아닌 작품이 OTT로 직행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사냥의 시간》은 코로나19가 낳은 영화의 변종, 혹은 영화산업의 커다란 변곡점으로 기억될 운명도 껴안게 됐다.

ⓒ리틀빅픽처스
ⓒ리틀빅픽처스

《사냥의 시간》이 그려내는 청춘의 지옥도

스모그가 자욱한 도시는 을씨년스럽다. 뉴스 영상이 송출되고 있는 대형 전광판에선 ‘국제통화기금 협상 반대 격렬 시위’라는 헤드라인이 흘러나온다. 흉물스럽게 녹슨 도심 곳곳에는 노숙자가 넘쳐난다. 실업자도 넘쳐난다. 생존권을 외치는 노동자들을 막아선 경찰의 손엔 총이 들렸다. 살벌하다. 타락의 도시 같다. 영화 《사냥의 시간》이 상상하는 서울의 근미래다. 윤성현 감독이 설계한 청춘의 지옥도이기도 하다.

가상의 미래인데도, 영화가 훑고 지나가는 도입부 이미지엔 묘한 현실감이 실려 있다. 우리 사회에 깊은 생채기를 남긴 1997년 IMF의 기억이 스크린을 타고 흐르기 때문이다. 그때 그 시절 어음이 휴지 쪼가리로 나뒹굴었듯, 《사냥의 시간》 안에선 현금이 휴지 조각이 됐다. 어른들은 절망하고, 청년들은 위태롭다. “가오 떨어지게, 거지새끼도 아니고, 남이 입던 옷을 어떻게 파냐?”라고 투덜대는 기훈(최우식)에게 “당장 쓸 돈도 없는데, 찬밥 더운밥 가릴 때야!”라고 핀잔을 주는 장호(안재홍)의 일침에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그 유명한 말이 무용한 시대임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

이야기는 단출하다. 네 명의 청춘이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고자 ‘한탕’ 범죄를 벌였다가 정체불명의 추격자 한(박해수)에게 쫓기는 게 전부다. 과거와 현재의 정보를 능수능란하게 조이고 풀어내는 솜씨로 긴장감을 축적시켰던 《파수꾼》과 달리, 《사냥의 시간》은 기승전결의 서사를 이탈하지 않고 착실하게 밟아가는 전략을 구사한다. 인물의 심연에서 이야기를 끌어올린 《파수꾼》과 다르게, 《사냥의 시간》은 인물들의 표정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파수꾼》의 정반대에 서 있는 영화

즉, 이 영화는 감독 윤성현이 《파수꾼》에서 잘한다고 평가받았던 면모들을 최대한 줄이고, 그가 전혀 새로운 접근법으로 자신을 입증해 보이려는 영화다. 《사냥의 시간》에서 모험가적 기질이 다분한 진짜 사냥꾼은 ‘한’이 아니라, 윤성현 감독인 셈이다. 적어도 한 곳에 고여 있지 않으려는 감독의 태도와 울퉁불퉁하더라도 남들이 쉽게 가지 않는 길로 자신의 비전을 몰아붙이려는 감독의 의도는 폄하돼서는 안 되는, 비슷비슷한 한국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 한국영화계에서 귀한 자세라 생각한다. 이 영화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극과 극의 평가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지만.

《사냥의 시간》은 케이퍼 무비로 시작해, 스릴러를 지나, 액션(감독 의도에 의하면 서부극) 형식으로 끝나는 영화다. “드라마가 아닌, 장르적 특성에 주목해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야심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더해져 더 강렬해진다. 프라이머가 만든 음악이 자아내는 분위기엔 묘한 박력이 있고, 다채로운 색감의 조명이 자아내는 시각적 이미지엔 인물들의 심리가 있다.

무엇보다 이제훈, 안재홍, 최우식, 박정민 등 충무로에서 유의미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젊은 배우들을 한 장면에서 만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즐거움이다. 비등점을 향해 서서히 달궈지는 이제훈의 표정은 그 자체로 화면을 꽉 채운다. 최우식과 안재홍의 티격태격하는 호흡과 물 흐르는 듯 임팩트 있는 박정민의 연기도 좋다. 그러나 배우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쓰임의 방식에서 이들의 운명도 적당히 갈린다. 특히 상수 역의 박정민은 연기적으로 뭔가를 보여줄 기회를 거의 제공받지 못하고 퇴장해 아쉬움을 남긴다. 기훈의 옷을 훔쳐 입거나 툭하면 자는 척하는 장호의 반복되는 버릇이 뻗어 나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영화 스스로 외면하기도 한다.

영화 서사의 실질적인 키를 쥐고 있는 박해수가 연기한 한이라는 캐릭터로 넘어가면 감상은 조금 더 복잡해진다. 영화는 한이 세 친구를 쫓는 동기와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한의 개인적인 퍼스낼리티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다소 뜬금없긴 하지만) “5분 줄게. 갈 수 있는 데까지 도망가 봐” “의외로 재밌네”라는 대사를 통해 이 인물이 게임 자체를 즐기는, 악인이라는 것을 예감케 할 뿐이다. 사실 이러한 악인 설정은 스릴러 영화에서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다. 무릇 악은 구구절절한 사연 없이 악 그 자체일 때 더 무서운 법이니까.

한이라는 캐릭터에게서 감지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그 유명한 악인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가 그렇다. 가깝게는 《추격자》의 지영민(하정우)이 그럴 것이다. 문제는 한의 이러한 면모가 그 자체로 악인으로 평가받기엔, 영화가 합당한 완결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시종 비장한 한과 달리, 그를 둘러싼 세계는 시스템이 다소 허술하거나 예상 가능해서(경찰과의 유착 등) 무시무시하게 느껴져야 할 한이라는 캐릭터가 종종 어리둥절하게 다가온다.

 

감춰야 할 것과 보여줘야 할 것 사이의 아쉬움

《사냥의 시간》은 영화가 보여줘야 할 부분과 감춰야 할 부분 사이의 조율에 여러 번 의문을 남긴다. 몇몇 인물의 서사와 이야기는 관객이 상상력으로 채워 나가며 관람하기를 요구하는데, 영화가 기본적으로 갖춰 둬야 할 설정과 상황에서도 이러한 추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각본에 대한 불신을 안긴다. 가상의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영화라 할지라도, 말하고자 하는 핵심에서는 사실적인 리얼리티를 갖춰야 하지만, 《사냥의 시간》은 이미지와 분위기에 신경을 쓰는 과정에서 몇 가지 의문을 해결하지 않고 넘겨버린다.

단계마다 다른 장르를 시도한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장르와 장르 사이에 타고 흐르는 감정의 비약이 커서 플롯이 거칠게 보이는 역효과도 있다. 갑자기 《영웅본색》의 주윤발을 방불케 하는 총격전을 벌이는 한과 제3의 세력 간의 항구 액션 시퀀스 창의성 역시 그리 좋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장점과 단점이 또렷한 《사냥의 시간》이 처한 또 하나의 허들이라면, 이 영화가 지닌 장점이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더욱 효과를 발휘하는 요소들이라는 점이다. 큰 화면에서 더 위력을 발휘할 빵빵한 사운드와 다채로운 이미지들 말이다. 넷플릭스로 향한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극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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