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에게도 국가가 있어야 해요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5.02 17:00
  • 호수 1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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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보다 나쁜 비대면 생태계 바이러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인으로서 최근 그야말로 ‘국뽕’ 차오르는 경험을 좀 했다. 국가가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 많은 일이 뜻밖에도 한국이라서 예외적으로 잘하는 것임을 알게 된 기분이 어질어질하다.

하지만 코로나19 첫 환자가 발생한 지 벌써 3개월을 넘기는 동안 생물학적 질병 못지않게 정신적으로 공동체를 파먹어 들어가는 사건들이 보고되고 있다. 집약해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라 불리는 ‘집단성착취물 영상거래방’의 실태가 밝혀지고 운영자 중 일부가 체포·기소되었다. 그러면서 선거 중임에도 언론의 관심이 상당히 할애되었다. 언론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한국 사회의 문제 해결의 참 중요한 방아쇠라는 점은 싫지만 사실이다. 문제가 드러나면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지닌 문제’도 더 크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일에는 국뽕은커녕, 한국에 태어난 비참, 이 땅에 태어난 잔인이라고 불러 마땅하지 않나. 남성들에겐 예외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이런 사건도 자기 영혼을 갈아 넣어가며 매달린 몇몇 여성들이 있어 사건화되었다는 사실이 아플 뿐이다. 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여성들이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을 너무나 자연스럽게들 하는가. 왜 다들 가해자 편에 서버리는가.

‘추적단 불꽃’ 유튜브 방송 화면 ⓒ추적단 불꽃’ 유튜브 캡처
‘추적단 불꽃’ 유튜브 방송 화면 ⓒ추적단 불꽃’ 유튜브 캡처

“언론은 피해자 걱정 안 하나”

텔레그램에서 성착취방이 운영되고 있음을 끈질기게 추적해 폭로한 여성들의 이름은 ‘추적단 불꽃’이다. 추적단 불꽃은 요청한다.

“모든 기사 단어 하나하나에 제발 신경 쓰십시오. ‘음란물’이 아닙니다. ‘성 착취’입니다. 음란물의 사전적 의미는 ‘음탕하고 난잡한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여전히 숱한 언론이 ‘아동 음란물’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가해자들의 명백한 성폭행 행위를 ‘몹쓸 짓‘이라고 표현하는 것 역시 언론의 2차 피해 유발이며, 가해자의 책임을 지우는 선택입니다. 이 사건은 심각한 인격 살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불법 촬영을 ‘몰카’라고 불러 사건을 희화화한 과거처럼, 성 착취를 모호하거나 보수적인 표현으로 부르며 피해의 심각성을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

그런데 이런 것을 언론에 요청씩이나 해야 할 일일까. 트럼프 바람에 국가적으로 끔찍해지고 있는 미국이지만, 다크웹 운영자 손정우를 미국으로 송환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이 처벌 못 한 그 악행과 범죄를 미국은 엄히 단죄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서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나. 왜 이런 일에는 국뽕 찾지 않나. 성폭력에 관한 한, 인종차별국가 미국보다 성차별국가 한국의 위상은 터무니없이 낮다. 성폭력이야말로 성차별을 온존시키는 결정적 무기이고, 남성 내 위계에서 오는 열등감을 무마시킬 수 있는 도구라는 점을 한국의 지배남성들이 모른 척 활용한다는 의심이 들 정도다.

추적단 불꽃의 요청에 덧붙여, 언론을 향해 요청한다. 기사 생산이 아무리 다급하더라도, 작금의 성폭력 사태는 근원적으로 우리가 기반한 사회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심각한 폭로라는 것을 인식하기 바란다. 코로나19로 비대면 경제 생태계를 이야기하는 지금, 그 생태계에 서식하는 끔찍한 바이러스가 바로 성폭력임을 인지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세계가 달라질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고작 열 몇 살짜리 남성이 여성의 수치심을 무기 삼아 돈벌이를 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에는 절대로 미래가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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