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긴급사태” 무색하게 하는 파친코의 위력
  • 류애림 일본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5.14 15:00
  • 호수 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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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딜레마’ 빠진 아베 정부…코로나 비상에도 통제 못 해

일본의 황금연휴를 앞둔 4월의 마지막 주말. 오사카의 한 파친코 업소 앞에는 문을 열기 전부터 기다란 줄이 생겼다. 개점 한 시간 전, 줄을 선 손님들에게 파친코 종업원들은 번호표를 나눠주기까지 했다. 간격을 벌려 줄을 서라고 하지만 인파가 붐비는 파친코 안에 들어서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코로나19 탓에 애를 먹고 있는 일본 지방자치단체들은 막무가내 영업을 이어가는 파친코 탓에 한숨을 내쉬고 있다. 왜 일본 정부는 파친코의 간판을 내리지 못하는 것일까.

일본 정부가 코로나 비상사태를 선포한 4월22일, 마스크를 쓴 방문객들이 한 파친코 업소에서 도박을 하고 있다. ⓒREUTERS
일본 정부가 코로나 비상사태를 선포한 4월22일, 마스크를 쓴 방문객들이 한 파친코 업소에서 도박을 하고 있다. ⓒREUTERS

‘3밀 피하기’에도 파친코에 몰려드는 인파

일본은 코로나19 대책으로 ‘3밀(密) 피하기’를 내세우고 있다. 밀폐·밀집·밀접접촉을 피해 집단감염을 막겠다는 계획이다. 파친코의 경우 3밀에 해당하는 시설이다. 따닥따닥 붙어 있는 파친코 기계 앞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는 이용객의 모습은 파친코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다. 3밀의 대표적인 시설이지만 파친코들은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파친코를 찾는 수요 자체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일본 지자체가 파친코 영업을 강제로 중지시키기도 어렵다. 일본의 경우 지자체가 휴업 요청을 하려면 ‘협력요청’ ‘요청’ ‘지시’의 단계로 집행해야 한다. ‘요청’의 경우 휴업하지 않는 시설의 이름을 공표할 수 있고 ‘지시’를 받으면 업자는 지시내용을 이행할 법적 의무가 생기지만, 벌칙은 없다. 오히려 지자체가 휴업 지시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손해배상을 청구당할 위험성도 있다.

4월7일 긴급사태가 선언된 이후 도쿄·오사카 등 긴급사태 선언 대상의 7개 지자체는 영화관과 스포츠클럽 등에 가장 가벼운 ‘협력요청’을 통해 휴업할 것을 요청했다. 4월16일부터는 일본 전국으로 긴급사태 선언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다중이용시설의 휴업 요청 또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협력요청’을 받고도 일부 파친코가 영업을 계속하자 4월24일 오사카부를 필두로 ‘요청’으로 상향해 영업 중인 파친코 이름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영업 중인 파친코는 이름이 공표되자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몇몇 파친코는 문을 닫았다. 하지만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다. 오히려 문을 연 파친코의 명단을 공개한 게 일종의 ‘홍보’가 된 것이다. 실제 명단 속 문을 연 파친코에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오사카의 파친코에 줄을 서 있는 방문객을 인터뷰했다. 그중에는 멀리 떨어진 와카야마(和歌山)현에서 온 부부도 있었다. 이들은 뉴스를 통해 공표된 리스트를 보고 먼 길을 달려왔다고 말했다. 파친코 주차장에서는 오사카 이외의 번호판을 단 차량도 다수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에 4월25일 요시무라 히로후미 오사카부 지사는 자신의 SNS에 이름이 공표된 뒤에도 영업을 하는 파친코가 4곳이나 남아 있는 상황을 보고하며, 긴급사태 선언 이후 지자체의 요구에도 문을 연 업소와 파친코에 몰려드는 이용객을 비판했다. 나아가 파친코를 도박으로 인정하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며 파친코 의존증과 중독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며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 해결을 촉구했다.

‘요청’ 공표에도 영업을 고집하는 파친코에 대해 ‘지시’로 상향한 지자체도 등장했다. ‘지시’로 상향하자 버티던 파친코 대부분이 휴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법적 의무가 생긴다고 해도 벌칙이 따르지 않는, 강제력 없는 조치이기 때문에 언제든 영업을 재개할 가능성은 있다. 대형 파친코 체인회사 관계자는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시’에 따르지 않아도 벌칙이 없다는 인식이 퍼지면 각지에서 영업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며 “여론보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휴업에 따른 손실이 너무 커 현재 일본 정부가 내놓은 현금 지급 등의 방안으로는 경영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얘기다. 일본 정부는 수입이 반으로 줄어든 중소기업에 대해 최대 200만 엔(약 230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지만, 파친코의 경우 한 달분의 임대료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것이 현실이다.

도치기(栃木)현 파친코들로 조직된 도치기현유기업협동조합은 5월1일, 7일 이후에 파친코를 휴업 요청 대상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일본 전국 파친코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한 사례가 없고, 외출 자숙 요청으로 가정 내 불화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시점에 ‘휴식처’ 역할을 파친코가 할 수 있다는 점, 감염 대책을 실시하고 있다는 점 등을 내세웠다. 또 휴업 요청에 따르지 않는 가게 중 유독 파친코만 업소명을 공표하는 것은 ‘직업 차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 영업을 이어나가는 식당들과 카페들에는 휴일에 많은 사람이 모이기도 한다.

 

파친코 영업 재개에 ‘섣부른 조치’ 우려도

일본 정부는 5월4일, 당초 5월6일까지로 정했던 긴급사태선언 기간을 5월31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감염자 수가 목표한 수준으로 줄어들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연장 발표와 함께 일본 정부는 경제 타격을 완화하기 위해 임대료 지원과 고용지원금 확충 등 경제대책 마련을 약속하며, 휴업 요청을 유지하거나 완화할 경우의 구체적 대응 지침도 각 지자체에 통지했다. 파친코 업계의 입김이 통했는지, 도쿄·오사카·교토 등을 포함한 13개 특별경계 도도부현을 제외한 34개 지자체의 경우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파친코의 영업제한 해제나 완화를 검토할 수 있다. 2m의 좌석 간격을 확보하고 마스크를 착용할 것, 환기와 소독을 하고, 실내 음악의 음량을 줄여 이용객들이 대화할 때 큰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 조건이다.

이에 파친코의 휴업 요청을 해제하는 지자체도 생겼다. 4월29일 이후 확진자가 없는 미야기(宮城)현의 경우 “경제적으로 너무나 피폐해진 사업자가 늘어났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판단했다”며 일본 정부의 긴급사태 연장 발표 다음 날인 5월5일 전 업종을 대상으로 휴업 요청, 단축영업 요청을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미야기현의 스포츠클럽·노래방 등은 5월7일부터 통상 영업을 재개할 수 있는데 파친코도 이에 포함된다. 아키타(秋田)현은 스포츠클럽이나 라이브하우스 등에는 휴업 요청을 연장했지만, 파친코는 휴업 요청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이제껏 파친코에서는 집단감염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스포츠클럽에서는 발생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지자체의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도 크다. 황금연휴 이후의 감염자 추세를 확인하기도 전에 휴업 요청의 해제와 완화를 결정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라는 것이다. 또 영업을 재개하는 파친코를 찾아오는 다른 지역 사람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은 상태의 해제와 완화는 무모하다며 감염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는 의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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