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계적 보수-진보론 넘어서자
  •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원장․정치학박사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5.13 16:00
  • 호수 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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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총선 결과를 두고 ‘보수 참패’라고 말한다.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칭 타칭 보수정당을 대표하는 정당인 통합당의 패배라는 의미에서다. 이제는 보수가 개혁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선거 이전에도 보수의 개혁, 또는 개혁보수는 있어 왔다. 보수를 자임해 온 세력의 개혁을 뜻하기도 하고, 보수 이념의 개혁을 뜻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보수-진보의 틀을 벗어나자, 이제 보수를 벗어나자는 주장까지 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수세력의 모습은 쉽게 연상된다. 민주화 이전의 우리 사회 주도세력이다. 이른바 근대화 세력이라고도 한다. 성장과 안보를 강조해 왔다. 이때 대비되는 세력은 진보라기보다는 민주화 세력이었다. 어떤 면에서 당시에는 민주화 세력이 진보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진보세력은 민주화 세력 중에서도 좀 급진적인 세력을 지칭했다.

1980년대 중반 급진세력이 성장하면서, 이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우리의 정치에서 보수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급진세력을 성토하면서 ‘보수는 죽었는가?’ 이런 담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치세력 구분의 기준은 보수-진보가 아니라 여당과 야당, 민주화 세력과 독재세력, 급진세력과 안정세력 이런 정도의 분류였다. 민주화 세력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김영삼 세력은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오히려 보수세력으로 불리는 오늘의 통합당 계열에 합류했다.

민주화와 더불어 3당 합당 이후부터 우리의 정치세력을 크게 보수-진보로 구분하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면서 여야가 역전된다. 기득권 세력과 민주화 저항세력을 지칭했던 전통의 여야 개념도 점차 무용하게 된다. 이제 구 집권세력이자 기득권 세력들이 보수로 불리게 되고 그들 스스로도 보수세력임을 자임한다. 반면에 민주화 세력의 정체성을 이어온 세력은 여전히 민주진영, 때로는 개혁진영으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시사저널 이종현·박은숙
ⓒ시사저널 이종현·박은숙

문재인 정부 들어 본격적으로 우리 정치의 양대 세력이 보수-진보로 구분된다. 여야 대결의 권력투쟁으로 시작했던 정치세력이 마치 보수-진보의 이념세력인 것처럼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념적·정책적 차이가 없진 않았지만, 정치적 세력 대결이 노선과 정책을 획일적으로 양극화시켰다. 대북정책에서는 강경과 포용으로 구분되고, 대내정책에서는 시장경제론과 복지국가론으로 대비된다. 

이렇게 정치세력 대결을 거치면서 양극화된 보수-진보론이 마치 그 자체가 목적 이념인 양 돼 있다. 가치의 실현 방식도 시대적인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중앙집중화가 기득권에 맞서는 진보였다가 근래에는 분권화가 오히려 진보적 가치가 돼 있다.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화가 초기의 진보였고, 근래에는 국가 개입을 통한 복지국가화가 진보 전략이기도 했다. 코로나19 상황을 겪는 요즘에는 민주화와 경제전략이 어떤 형태로 재정립될지 모른다.

이번 21대 총선에서 진보의 승리와 보수의 참패를 결정했던 변수는 정책적 선택보다 두 세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 정도였다. 보수세력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는 것이 보수의 재편과 개혁의 초점이다. 집권세력의 불공정과 부도덕을 성토하는 대안 세력이라면, 그 보수의 가치는 대북 강경이나 시장자유 이전에 공정성과 도덕성이 되어야 한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정통성을 자산으로 삼고 있는 진보진영 또한, 이제 스스로가 투쟁의 대상이었던 권력이 이미 돼 있다. 포용과 공존 같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과제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몰역사적인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가 아니라, 공동체의 윤리를 보완하는 상호경쟁이 될 수 있다. 보수와 진보 모두 시대착오적인 기계적 보수-진보론을 넘어서야 한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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