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가슴에 묻은 56년
  • 소종섭 편집국장 (jongseop1@naver.com)
  • 승인 2020.05.11 09:00
  • 호수 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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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피해자들이 이 세상에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잊을 수가 없지요. 구속되던 날 하루 종일 비가 쏟아졌던 것도, 검사가 강압적으로 수사하던 것도 모든 기억이 생생합니다. 평생 한이었거든요.”

언론 인터뷰에서 여성은 절규했습니다. 50년이 넘게 가슴에 묻어 놓았던 그 아픔을 누가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강산이 몇 번 바뀌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일입니다. 지난 5월6일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한 최말자씨(74) 얘기입니다. 그녀는 1964년 5월6일, 성폭행을 하려는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죄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지금이라도 당시 행위가 정당방위였음을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6일 오후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성폭력 피해자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1964년 성폭행을 시도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최말자 씨는 이날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했다 ⓒ연합뉴스
6일 오후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성폭력 피해자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1964년 성폭행을 시도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최말자 씨는 이날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했다 ⓒ연합뉴스

56년 전 사건에 대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이들도 있지만 천만의 얘기입니다. 당사자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한이자 불명예입니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것이 이런 일입니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 평생을 가는 기억이라고 할까요.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에도 살아 있는 과거로서 때때로 현실 속에 살아옵니다. 당사자로서는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관련자들에 대한 원망도 지워지지 않겠지요.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제게도 잊히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30여 년 전 대학생 때 일이지만 불현듯 한 번씩 떠오르곤 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일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바람 같은 일도 누군가에겐 깊은 상흔을 남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좋은 기억은 아니지요. 최말자씨 사례를 보면서 다시 그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최씨의 마음속 깊은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세월이 지울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최씨에게 ‘폭력’을 가한 이들은 성폭행 가해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최씨를 둘러싸고 수군거린 동네 사람들, 오히려 피해자를 윽박질렀던 수사기관 인사들, “호감이 있었던 것 아니냐”며 폭행 당사자와 결혼할 것을 권한 재판부…. 당시 사회상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곤 해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상대방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물론 당사자는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안에서 당사자의 인식 여부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주는 피해가 중요합니다. 때로는 보이는 피해보다 보이지 않는 피해가 더 큰 아픔을 줍니다.

최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처를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가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용기를 내서 꼭 자신의 삶을, 행복을 되찾길 바랍니다.” 최씨가 명예를 회복해 남은 생이 봄날 같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호는 여권 물밑에서 본격화하는 대선주자들의 움직임에 주목했습니다. 날이 더워집니다. 건강에 유의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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