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 방사광가속기 고배 마신 나주 “반발”
  • 호남취재본부 정성환·배윤영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 승인 2020.05.09 10:1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남지사·나주시장 “방사광가속기 선정 재심사해야”
“혈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청주 선정에 강력 반발
지역균형발전 푸대접 비판…“나주에 하나 더 만들자”

“누군가 혈서라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8일 오전 11시 35분 전남 나주시 현관 로비. 강인규 시장 주재로 열린 방사광가속기 유치 실패 대응 관련 간부회의를 끝내고 1층 시장실을 막 빠져 나온 한 시청 간부가 한 말이다. 방사광가속기 유치 경쟁 탈락에 대한 지역 관가의 불만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청사 2층 자신의 집무실에서 만난 박봉순 부시장은 방사광가속기 유치 탈락 소식에 “정부 방침이지만 어찌 허탈하지 않을 수가 있겠냐”며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박 부시장은 “기대를 많이 했다가 탈락에 상심한 주민들을 시 차원에서 어떻게 달래야할 지가 급선무다”고 난감해 했다.

같은 시각 무안 남악의 김영록 전남지사는 별도의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김 지사는 무려 6시간여의 장고 끝에 오후 5시쯤 도청 브리핑룸과 페이스북에 입장문을 내고 정부를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그는 “청주 오창은 부지 정지에 많은 시간과 예산이 소요되고 미래 확장 가능성도 부족하다”며 재심사를 요구했다. 또 “애초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했다”며 “나주에 가속기를 하나 더 구축해 달라”고 몰아부쳤다.

​김영록 전남지사가 8일 오후 도청 브리핑룸에서 다목적 방사광가속기 부지 선정에 따른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김 지사는 입지 선정의 전 과정이 기울어진 운동장였다며 강한 유감 표명 및 세부적인 평가 결과 공개와 재심사를 강력히 요청한다고 밝혔다. ⓒ전남도​
‘6시간의 장고 끝에 나온 입장문’ ​김영록 전남지사가 8일 오후 도청 브리핑룸에서 다목적 방사광가속기 부지 선정에 따른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김 지사는 입지 선정의 전 과정이 기울어진 운동장였다며 강한 유감 표명 및 세부적인 평가 결과 공개와 재심사를 강력히 요청한다고 밝혔다. ⓒ전남도​

각계 “지역발전 좋은 기회 놓쳤다” 허탈·당혹

전남지역 공직사회와 각계각층은 이날 오전 방사광가속기 유치 성공 소식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오전 10시30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충북 청주 오창을 가속기 입지로 선정해 발표하자 긴 탄식과 함께 당혹감에 빠졌다. 한전공대와 방사광가속기의 상승효과를 기대했던 방사광가속기 호남권유치위원회는 “지역 발전의 좋은 기회를 놓쳤다”며 허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유치위원회 한 관계자는 “방사광가속기는 나주에 들어서는 한전공대의 기본계획 연구시설에 포함돼 있다”며 “방사광가속기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있는데도 탈락한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민들도 “그동안 방사광가속기 유치를 통해 호남인들이 서명운동 등 적극적으로 유치의 뜻을 모으는데 노력해왔다”며 “기대를 많이 했는데 결국 탈락돼 큰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나주시 빛가람동 주민자치회 백은숙(62) 부회장은 “어제까지만 해도 다들 이구동성으로 유치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정도로 기대가 컸던 터라 막상 탈락하고 보니 실망이 대단하다”며 “그렇지만 지난 일은 훌훌 털고 이제 더 좋은 차세대 방사광가속기(출현)에 맞춰서 준비하고 다시 도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아직 발표 결과를 전해 듣지 못한 듯 생업에만 골몰하는 분위기였다. 빛가람동 LH 4단지에서 만난 한 주민은 “방사광가속기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 머릿속에 뭔가 잡히는 게 없다”고 말끝을 흐렸다. 


김영록 “애초 기울어진 운동장” 정부 작심 비판

김영록 전남지사를 비롯해 전남 농업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30개 농업인단체 회장들이 4월 28일 다목적 방사광가속기 전남 유치를 호소하고 있다. ⓒ전남도
김영록 전남지사를 비롯해 전남 농업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30개 농업인단체 회장들이 4월 28일 다목적 방사광가속기 전남 유치를 호소하고 있다. ⓒ전남도

전남도는 지역균형발전보다는 수도권 접근성에 무게를 둔 잘못된 결정이라며 반발했다. 김영록 전남지사는 페이스북에 올린 입장문에서 “납득할 수 없다”며 강한 유감을 표명하고 평가결과 공개와 재심사를 촉구했다. 김 지사는 입장문 서두에서 “모든 것이 저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자책하면서도 “입지선정 전 과정이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고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문재인 정부 초대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지낸 김 지사가 정부를 공식적으로 비판한 것은 2018년 7월 도지사 취임 이후 처음이다.

김 지사는 “전남도는 여러 차례 평가항목과 기준의 개선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를 반영하지 않았다”며 “국정목표인 국가균형발전 분야의 비중도 미미한 수준이었고 수도권 접근성과 현 자원의 활용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반영해 평가했다”고 정부에 화살을 돌렸다. 김 지사는 “이는 과학계 테크노크라트 세력의 수도권 중심 사고에서 기인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으며 대전 이남에는 대규모 연구 시설 등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의미나 다름없다”고 반발했다. 

김 지사는 방사광가속기를 하나 더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 가속기 입지로 최고 적지인 빛가람혁신도시 나주에 방사광가속기를 추가적으로 하나 더 구축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정부를 압박했다.

나주시는 한술 더 떴다. 전체적인 기조는 전남도와 보조를 맞췄지만 향후 대응방안에서는 수위가 한층 높았다. 강인규 나주시장은 이날 오후 늦게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나주시민은 오늘의 결정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며 “절차와 과정이 불공정하고 편파적으로 진행된데 대해 매우 강한 유감을 표한다”고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또 강 시장은 “12만 나주시민과 광주·전남북 시도민, 250만 호남인은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끝까지 투쟁해 나가겠다”고 밝혀 김 지사보다 한 발짝 더 나갔다. 이는 방사광가속기의 추가 구축 시 선점을 위해 정부에 대한 일종의 ‘알박기식’ 압박이자 전남도와 달리 직접 대민 접촉하는 기초단체로 성난 민심을 다독이기 위한 ‘의도된 과잉대응’으로도 읽힌다.    

 

‘여의도 떠나는’ 김경진 “구시대적 발상 이젠 안 통해” 

전남도와 나주시가 제시한 방사광가속기 예정부지 ⓒ시사저널 배윤영
전남도와 나주시가 제시한 방사광가속기 예정부지 ⓒ시사저널 배윤영

민주당 일색의 지역 정치권이 일제히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무소속 김경진(광주 북을) 의원은 작심하고 비판했다. 김 의원은 방사광가속기 선정 발표 직후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고향 전남에 유치되지 않아 아쉽지만 냉철하게 본다면 충북도와 유관기관들은 정치권의 협조아래 2017년부터 준비하고 기획해왔다”며 “국회에서 세미나도 수차례 한 것으로 기억한다. 넉넉한 시간을 두고 준비하고 보고서를 마련하고 있었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김 의원은 철저한 사전 준비없이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남도는 한전공대 확정이후 2019년에 갑자기 뛰어들었다. 정치의 힘을 활용하려고 한 징후도 엿보였다”며 “(방사광가속기 구축사업은) 객관적인 조건과 능력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는데도 단체장과 정치인들이 현수막 들고, 사진 찍고, 집단서명 받고, 청와대 게시판에 청원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 같다”고 꼬집었다. 그의 쓴 소리다. 

“이제는 그런 방식의 문제 해결을 지양해야 한다. 통하지 않는다. 가령 그런 방식으로 정치를 활용해 다른 지자체가 오랫동안 준비하고 공들여 온 것을 빼앗아 온다면, 내 고향 호남에 대한 다른 지역의 시선도 곱지 않게 변할 가능성도 있어서 좋은 수단이 결코 될 수 없다.”

이번을 계기로 전남도 길게 지역발전을 준비하는 그랜드 마스터플랜을, 넉넉한 시간을 두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습관이 생겼으면 한다는 게 이달 29일 국회를 떠나는 김 의원이 남긴 조언이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