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훼손 심각, 자제해야” vs “사죄때까지 밟아야”
“나쁜 아저씨야!”
5월 17일 오후 광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제3묘역. 다섯살배기 남자 어린아이가 묘역 입구 길바닥에 묻혀 있는 ‘전두환 기념비’를 밟으며 이 같이 소리쳤다. 이 아이는 본가가 광주인 아빠를 따라 강원도 춘천에서 참배 왔다. 전남대 출신인 아버지 김아무개(36)씨는 “어린아이가 민주주의가 뭔지 알았겠느냐”며 “비석의 유래에 대한 어른들의 말을 듣고 그런 것인지, 갑자기 (비석을)밟으며 소리쳐 깜짝 놀랐다”고 했다.
울산에서 왔다는 변호사 김태엽(35)씨는 “학생과 군대시절 이후 오랜만에 왔으나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어 예나 지금이 엄혹한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다”며 “비석 밟기는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죄가 결여된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다. 역사의 완성 측면에서 법적인 판결 내지는 확실한 증거를 통해 국민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가해자가 빨리 확정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기념비석은 1982년 3월, 전씨 내외가 전남 담양군 고서면 성산마을에서 민박을 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른바 ‘민박 기념비’에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광주·전남민주동지회는 1989년 1월 기념비의 일부를 떼어내 망월동에 가져와 땅에 반쯤 파묻었다. 참배객들이 전씨에 대한 분노를 담아 밟고 지나갈 수 있도록 설치한 것이다. 5·18 희생자들의 혼을 달래기 위한 저항의 기념비로 활용한 셈이다.
‘전두환 비석’을 밟고 지나가는 것은 추모객들의 ‘통과의례’다. 특히 민주·진보인사들의 정해진 코스다. 묘역을 찾은 많은 이들이 이 비석을 즈려밟으며 ‘5월 광주’의 의미를 되새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19대 대통령 후보 당시 국립5·18 묘역 참배를 끝내고 나오다 전씨의 ‘민박 기념비’가 땅에 묻혀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가던 길을 되돌아와 이 비석을 발로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이후 묘역을 찾은 이낙연 국무총리, 김명수 대법원장,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지사, 추미애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도 이 비석을 밟았다. 지난 2018년 10월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와 김소연씨 부부도 이 비석을 봤다. 반면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전두환 비석 밟았는지 여부를 두고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 비석 밟기’를 놓고 작은 논란도 있다. 이 비석의 존치 여부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밟아 원형이 크게 훼손돼 가는 상황이라는 게 묘역 측의 주장이다. 이에 최근에는 오히려 묘역 측에서 가끔 참배객들의 ‘밟기’를 자제시키기도 한다. 지난 2018년 8월 묘역을 찾은 당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역사적 가치를 위한 보존 차원에서 되도록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비석을 밟지 않았다.
한 해설사는 “광주시나 5월 단체 측의 공식 입장은 아니지만, 해설사들 사이에서는 ‘전두환 비석’을 보존하는 것이 ‘5월 광주’를 알리는데 더 의미가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5·18기념재단 관계자도 “밟고 다니는 것은 좋은데,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전두환의 만행을 잊지 않도록 해야 되지 않나 생각이 든다”며 “원형보존을 위한 유리 덮개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반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선 전씨가 5·18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를 할 때까지 ‘비석 밟기’가 계속돼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하다. 옛 망월묘역에서 만난 시민 조모씨(49)는 “전두환씨가 사과 한마디 없이 오히려 광주를 모욕하는 상황에서 비석을 손대면 안 된다”며 “이 글자가 닳아져 없어지더라도 전씨가 사죄할 때까지 밟고 지나야 한다”며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