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시평인가 선전인가, 누하동 260 [최보기의 책보기]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thebex@hanmail.net)
  • 승인 2020.05.2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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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당나귀를 만나 보셨나요》ㅣ박미산 시ㅣ채문사 펴냄ㅣ120쪽ㅣ9000원

조선 화가 겸재 정선의 작품 중 수성동 계곡을 그린 그림이 있다. 양반 세 명이 계곡의 돌다리를 건너 풍경을 감상하고 이들의 수발을 드는 하인인듯한 이가 뒤를 따른다. 이들 양반들은 아마도 계곡 위 풍광 좋은 너른 바위에 터를 잡고 선배 문인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을 읊으며 느긋하게 봄을 즐겼으리라.

 

갓 괴여 익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받쳐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 놓고 먹으리라

화풍(和風)이 건듯불어 녹수(綠水)를 건너오니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에 진다

아아, 술이 절로 당긴다. 지금도 수성동 계곡에 가면 그 양반들이 건넜던 돌다리와 앞산의 풍경이 그대로 남아있다. 계곡이 끝나는 곳에서 옥인동 골목길을 내려와 사직동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야트막한 고개 밑에 ‘백석과 흰 당나귀’라는 간판을 단 ‘문학살롱’이 하나 있다. 누하동 260번지다.

살롱을 운영하는 사람은 《루낭의 지도》(2008), 《태양의 혀》(2014)에 이어 세 번째 시집 《흰 당나귀를 만나 보셨나요》를 펴낸 박미산 시인이다. 그녀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인 백석을 깊이 연구한 박사이기도 하다. 당신이 마침내 ‘발 밑 버석거리는 술 찌꺼기를 밟고 이층으로 올라가’ 살롱에 자리를 잡으면 ‘당신의 등 뒤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고 유리창 너머 더 큰 벚나무가 있어 당신의 등을 만지던 벚나무 가지가 햇살을 돌아 당신 앞에 앉는다’

 

경복궁 지나

금천시장을 건너오면

흰 당나귀를 만날 거예요, 당신은

꽃피지 않는 바깥세상일랑 잠시 접어두고

몽글몽글 피어나는 벚꽃을 바라보아요

뜨거운 국수를 먹는 동안

흰 꽃들은 서둘러 떠나고

밀려드는 눈송이가

창문을 두드려요

펄떡이던 심장이 잔잔해 졌다고요?

...

수성동 계곡의 물소리를 따라오세요

불빛에 흔들리는 마가리가 보일 겁니다

우리 잠시, 흰 당나귀가

아주까리기름 쪼는 소리로

느릿느릿 읽어주는 시를 들어보자고요

백석의 흰 당나귀가 들려주는 시를 듣기 위해 오늘 밤에도 문인이 들르고, 화가가 들르고, 작가가 들르고, 애주가들이 들르는 곳, 누하동 260번지. 이제는 흔치 않은 시인의 문학살롱이다. 가끔 운수 좋은 날에는 이름을 얻은 문인들과 합석해 ‘한 잔의 술을 마시며 버니지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할 수도 있다.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 가을 바람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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