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낱낱이 드러난 ‘모래알 EU’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5.31 10:00
  • 호수 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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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와의 전쟁 속, 우리는 ‘자국 이기주의’와 싸우고 있다”

지난 1월16일 프랑스 ‘파리정치대학’에 소속된 국제연구센터(CERI)는 우파 성향 주간지 ‘르 푸앙’과 공동으로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2030년-유럽의 종말?’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제목의 기사는 향후 유럽연합(EU)에 큰 위기를 가져올 세 가지 요인을 다루고 있다. CERI와 르 푸앙이 공통적으로 제시한 EU의 위기는 ‘브렉시트’와 ‘포퓰리즘’ 그리고 ‘중국의 공세’였다. 당시는 영국의 브렉시트 최종 시한인 1월31일을 딱 보름 남겨둔 시점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이미 EU의 미래에 대한 우려는 유럽 전역에 팽배해 있었다. 이 보도가 나온 시기 역시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폐렴 진단을 최초로 밝힌 지 단 3일 만이며, 세계보건기구(WHO)가 이를 팬데믹(Pandemic)이라 선언(3월11일)하기 무려 두 달 전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2015년 난민 사태 그리고 2020년 브렉시트와 ‘코로나19’에 이르기까지, EU는 주기적으로 위기설이 제기돼 왔다. 흥미로운 건 EU 위기의 발단은 이러한 국제정세나 경제 여파 등 ‘외부’의 사건으로 촉발되지만, 결과적으로 늘 조직의 근간을 흔드는 것은 ‘내부 분열’이었다는 사실이다. 탈퇴한 영국을 제외하고 현재 26개국이라는 적지 않은 국가가 모인 만큼, 사안마다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간단치 않은 일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도 북유럽과 남유럽이 갈라서는 모양새이며, 난민 사태 때도 동유럽과 서유럽이 이견을 보이며 싸우기 바빴다.

회원국 이탈리아의 패닉을 외면한 EU

코로나 사태 초기 유럽 내에선 ‘국경 폐쇄’라는 극단적 선택이 조기에 등장해 ‘자국중심주의’라는 대륙의 오래된 악령을 깨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EU의 ‘취약한 대처 능력’은 곧장 수면 위로 떠오르며 논란을 낳았다. 이탈리아 사례가 단적이다. 유럽에서 최초로 코로나 충격을 받은 이탈리아는 지난 1월31일 ‘의료비상사태’를 선언하며 EU 회원국의 보건부 장관 간 긴급회동을 제안했다. 긴급 구조요청(SOS)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정작 회의가 소집된 것은 그보다 2주가 지난 2월13일이었다. 스텔라 키리야기 EU 보건 담당 집행위원은 “의약품 부족 문제는 보고된 바 없다”며 이탈리아의 호소와 세간의 우려를 단번에 일축했다.

보름 후인 2월28일, 이탈리아는 다시 EU 회원국에 ‘마스크 및 의료장비’ 지원을 요청했다. 역시나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했다. 이후 이탈리아에 마스크와 의료 물자를 제공한 나라는 3월12일 중국이 유일했다. 아무런 지원 없이 고립된 이탈리아는 결국 3월8일 상황이 심각한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 봉쇄령을 내렸고, 이튿날 전국으로 확대했다. 급격한 확산세에 놀란 인접국 오스트리아는 확진자가 206명밖에 나오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국경 봉쇄를 결정했다. EU 내 ‘도미노 국경 봉쇄’의 서막은 이렇게 열렸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3월9일 자신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환경’과 ‘경제’ 문제, 그리고 ‘그린딜’만을 강조했을 뿐 코로나 사태에 관해선 “이탈리아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내놨다. 이에 대해 EU 이탈리아 대사인 마우리치오 마사리는 이튿날 코로나 사태 이후 최초의 회원국 정상 간 긴급화상회의를 몇 시간 앞두고 프랑스 경제 전문지 ‘라트리뷴’ 기고문을 통해 “이번 코로나 전쟁은 두 개의 끔찍한 적과 싸워야 한다. ‘공포’와 ‘이기주의다’”라고 규정하며 “우리가 빨리 깨어나지 않는다면, 몽유병 환자처럼 전쟁에 뛰어든 1914년의 상황을 반복하게 될 것”이라고 EU의 태도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날 긴급화상회의에서 회원국 정상들은 코로나 사태를 위한 긴급지원금으로 250억 유로(약 34조원)를 조성하기로 합의했으며, EU의 ‘금과옥조’였던 ‘재정 적자 상한선 3%’에 대해서도 완화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연쇄적인 국경 봉쇄 흐름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EU는 이미 이때부터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5월18일(현지시각)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화면 속)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화상회의 방식의 정상회담을 열어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EU 회원국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연합뉴스
5월18일(현지시각)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화면 속)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화상회의 방식의 정상회담을 열어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EU 회원국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연합뉴스

‘공동채권’ 두고 의견 갈린 두 EU 핵심국

3월8일 이탈리아, 9일 오스트리아가 국경을 닫은 이후 회원국들은 12일(슬로바키아·체코)과 13일(덴마크·폴란드·리투아니아), 15일(프랑스·오스트리아·스위스·룩셈부르크·덴마크)까지 연이어 국경을 걸어 잠갔다. 이는 55년 전인 1965년 솅겐조약(EU 회원국 간 무비자 통행을 규정한 국경 개방 조약으로, 유럽 통합의 상징이 된 사건) 이후 초유의 조치였다.

최초의 국경 봉쇄보다 더 심각한 건 어느 때보다 깊어진 회원국 간 갈등의 골이었다. 돈을 풀어 코로나 대처를 지원한다는 EU 내 ‘공동채권’ 방안에 당장 네덜란드가 강력히 반대하며 파열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봅커 훅스트라 재무부 장관이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 완충 장치’에 대한 조사를 주장하자, 안토니오 코스타 포르투갈 총리는 “구역질 나는 발언”이라고 들이받았다. ‘코로나 본드’로 불리는 이 유로존 공동채권은 벨기에·그리스·아일랜드·이탈리아·룩셈부르크·포르투갈·슬로베니아·스페인 등 9개 나라의 공동성명에서 출발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선봉에 서 있는 대책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함께 EU의 쌍두마차인 독일은 이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프랑스가 마크롱 취임 이후 보기 드물게 독일의 반대편에 서게 된 것이다.

공동채권을 두고 벌어진 갈등은 4월1일 네덜란드 측의 유감 표명과 함께 일단 봉합되는 수순을 밟았다. 프랑스와 독일 양국 정상의 이견 역시 5월18일 마크롱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5000억 유로(약 674조원)에 이르는 기금 조성 방안을 발표하며 수습되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네덜란드를 필두로 오스트리아와 덴마크, 스웨덴은 ‘공동 기금’이 아닌 ‘대출’ 형식을 주장하는 등 좀체 목소리가 모아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5월27일 EU 집행위원회는 돌연 2021~2027년 장기 예산안을 발표했다. 집행위원회는 26개 회원국 정상들과 각료로 구성된 유럽이사회와는 별도로 EU 내 각종 정책을 입안하는 등 사실상 ‘행정부’ 역할을 하는 핵심기구다. 이날 예산안 발표는 마치 돈을 내놓을 국가들의 ‘답’도 듣지 못한 채 ‘지출 내역서’가 먼저 나와버린 셈으로, 회원국들을 더욱 혼란케 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코로나 사태처럼, EU 회원국 간 갈등 소지가 연일 새롭게 터지면서 이들의 관계는 코로나19 이후에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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