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설국열차》가 《오리엔트 특급살인사건》을 만나면?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5.31 11:00
  • 호수 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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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식 삑사리' 없는 《설국열차》, 어떻게 달리게 될까

미국 TV 드라마 시리즈 《설국열차》가 본격 운행을 시작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미국 드라마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이 들린 게 2015년이었으니, 5년 만이다. 그동안 봉준호 감독의 위상은 《기생충》을 통해 크게 달라졌다. 모르긴 해도 《기생충》이 아카데미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날, 국내 관객 못지않게 기뻐한 건 영화 《설국열차》 판권을 일찍이 구매한 투모로우 스튜디오와 방영권을 따낸 방송 채널 TNT가 아니었을까.

타이밍엔 복이 있나니. ‘봉하이브(BongHive·봉 감독을 열렬하게 응원하는 팬덤)’ 효과는 수치가 증명한다. 지난 5월17일 미국 TNT를 통해 선공개된 《설국열차》엔 330만 명의 시청자가 몰려들었다. 주요 TV 시청층인 18세에서 49세까지 시청자는 60만7000명. 2018년 TNT에서 방송한 《에일리어니스트》 이후 가장 높은 데뷔 성적이다. 국내에서는 미국보다 늦은 5월25일 1~2회가 공개됐고, 역시나 관심이 높은 분위기. 국내 관객으로서는 봉준호 감독의 세계관이 드라마에서 얼마나 변했을까에 호기심이 모일 텐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맛’이다.

온난화를 막기 위해 인류는 지구의 기온을 낮추는 화학약품을 만든다. 자연을 화학약품으로 되돌리려는 것 자체가 패착이었고, 자만이었다. 그 부작용으로 지구는 꽁꽁 얼어붙는다. 바야흐로 새로운 빙하기. 인류는 전멸한다. 화학약품의 부작용을 예상한 윌포드가 미리 만들어 놓은 1001칸 길이의 거대한 방주, 설국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이 방주는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앞칸은 거금을 내고 오른 부자들 차지다. 호화로운 생활이 보장된다. 뒤로 갈수록 계급의 급수가 떨어진다. 그렇다면 꼬리칸은? 무임승차한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무차별적인 차별이 꼬리칸에 가해진다. 가난한 자들은 자유가 그립고 맛있는 음식이 고프다. 이 지옥을 빠져나갈 유일한 방법은 혁명. 꼬리칸 사람들은 해방을 위한 계획을 짠다.

미국 드라마 시리즈 《설국열차》의 한 장면 ⓒNetflix
미국 드라마 시리즈 《설국열차》의 한 장면 ⓒNetflix

같은 세계관 다른 운행방식

기본 세계관은 영화와 같다. 경제적 계급에 따라 분류된 기차 안 세계는 현실의 축소판이다. 하지만 두 시간 분량의 영화를 10회로 만들려면 이야기 확장은 불가피한 상황. 드라마는 이를 ‘장르의 확장’에서 찾는다. 꼬리칸의 정신적 지주이자 혁명을 이끄는 리더인 레이턴(다비드 디그스)이 전직 형사라는 설정에 열쇠가 있다. 열차에서 살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레이턴은 형사였다는 이유로 열차 관리자 멜라니(제니퍼 코넬리)에게 호출되면서 드라마는 SF 외에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옷을 입는다.

꼬리칸부터 엔진실까지 한 방향으로 직진하는 액션에 방점을 찍었던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이를 포기하고 새판을 짠 셈. 토막 난 시체, 과거 범인 검거의 오류, 비밀을 숨긴 듯한 사람들… 그러니까 이건 《설국열차》 세계관 위에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극 《오리엔트 특급살인사건》을 곁들인 모양이라고 보면 쉽겠다.

범죄 추리극은 《CSI 과학수사대》를 비롯해 미드가 사랑해 온 장르이니 제작진의 선택이 그리 놀랍지는 않다. 같은 이유로 아주 반갑지도 않다. 조금 빤한 선택 같달까. 영화의 매력이었던 디스토피아적 분위기 훼손도 불가피해 보이는데, 결국 관건은 추리의 세계를 얼마나 쫄깃하게 구현해 내는가다. 그리고 그것을 설국열차 세계관에 얼마나 이질감 없이 버무려 내느냐로 갈릴 것으로 보인다. 살인 사건을 파헤치기 위한 레이턴의 추리 서사와 기차의 혁명을 노리는 꼬리칸의 서사가 시너지를 낼지, 불협화음을 낼지 지켜볼 일이다.

드라마가 이야기를 늘이기 위해 선택한 또 하나의 전략은 열차 밖 세계, 즉 인물들이 열차에 타기 전의 모습을 회상 신으로 과감하게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다만 이 방법 자체가 나쁠 건 없는데, 1~2회에서는 이를 너무 감상적인 쪽으로 사용하면서 상투성을 입힌 면이 있다. 좋게 말하면 대중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이 또한 흔해서 전형적이다. 이 과정에서 영화에는 없는 멜로 드라마적 요소가 부각된 것도 차별점. 사실 ‘플래시백’과 ‘멜로 드라마’ 요소는 영화의 원작인 그래픽 노블이 지녔던 부분인데, 드라마는 이를 적극 끌어안을 것임을 1~2회는 예고한다.

크리스 에반스가 연기했던 커티스 캐릭터가 레이턴으로 큰 변화를 꾀한 것과 함께, 기차의 1인자 윌포드도 크게 수정됐다. 영화에서 윌포드는 영화 마지막에 등장해 관객들의 뒤통수를 크게 때려주는 캐릭터였다. 반면에 드라마는 윌포드의 정체를 일찍이 밝히고 달린다. 극 전반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란 신호다. (1~2회 관람의 재미를 방해할까 봐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절대신’의 존재로 그려진 영화 속 윌포드와 달리, 드라마의 윌포드는 적당히 인간적이고 적당히 고독하며 적당히 악해 보이는 가운데 오리무중의 표정을 내내 품고 있다. 물음표인 윌포드의 표정이 느낌표로 바뀌어 나가는 과정은 이 드라마를 보는 또 하나의 관람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원작의 서사 순서를 과감하게 바꾸고 재배치하는 건, 리메이크의 특권인데 이를 과감하게 휘두르고 있다는 점엔 점수를 주고 싶다.

미국 드라마 《설국열차》에는 다양한 분위기의 열차 칸들이 등장한다. ⓒNetflix
미국 드라마 《설국열차》에는 다양한 분위기의 열차 칸들이 등장한다. ⓒNetflix

설국열차 1인자, 윌포드 캐릭터에 큰 변화

윌포드 캐릭터 비중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약해진 건 영화에서 틸다 스윈턴이 연기했던 메이슨 총리 캐릭터다. 사실 이는 단순히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의 차이이기도 한데, 틸다 스윈턴이 구현해 낸 메이슨 총리가 워낙 독보적이었으므로 그 어떤 배우가 들어와도 부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메이슨 총리뿐 아니라, 드라마 《설국열차》가 풀어야 할 숙제로 보이는데, 아직까지는 딱히 마음이 가는 인상적인 캐릭터가 보이지 않는다. 개성 있는 캐릭터의 승차가 필요해 보인다.

영화 《설국열차》보다 확실히 인상적이라 할 수 있는 건 설국열차 외관이다. 제작비 상황으로 인해 다소 투박하게 구현됐던 영화 속 설국열차와 비교하면, 드라마 속 설국열차는 조금 더 매끈하고 화려하고 무엇보다 길다. 그래픽 노블에서 설정된 열차의 칸은 총 1001칸. 칸을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았던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자신감의 일환인지 1화에서 그 정보를 자세하게 흘린다. 시간을 더 확보한 만큼, 조금 더 다양한 분위기의 칸들도 등장한다. 기대요소다.

캐릭터나 서사 등은 사실 1차적인 이야기이고, 개인적으로 영화와 드라마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극한의 상황에서 역설적인 웃음을 만들어내는 ‘봉준호식 리듬’의 유무란 생각이 든다. 당연한 말이지만, 드라마 《설국열차》엔 봉준호의 삑사리가 없다. 가령 절체절명의 순간 커티스가 생선을 밟고 뒤로 자빠진다거나, 메이슨 총리가 무게 잡고 연설하려고 할 때 뒤에서 뭔가가 떨어진다거나, 말짱한 틀니를 갑자기 빼는 등의 돌출적인 면이 없다.

물론 드라마가 봉준호와 같을 필요는 절대 없다. 대신 봉준호와는 다른 그만의 특색을 기대했는데, 그 점에서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색깔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 《설국열차》는 봉준호의 《설국열차》와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TNT가 최근 10년 동안 만들어왔던 SF 드라마와 정확하게 같은 종류다”라고 평가한 인디와이어의 평에 눈길이 간다. 이제야 첫 삽을 뜬 만큼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자기만의 색깔을 장착하고 달리는 드라마 《설국열차》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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