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 중국 기독교사 담아낸 《대륙의 십자가》
  • 조창완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6.07 13:00
  • 호수 1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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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로를 이해하면 대륙이 보인다

중국은 스스로 중원이라 칭하고, 용의 후손을 자처한다. 무엇보다 중국인들이 가장 자부하는 것은 스스로가 종교와 사상의 용광로라는 점이다. 실제로 이 말은 그르지 않다. 중국은 자국에서 생겨난 유교나 도교는 물론이고 외래에서 전파된 불교나 이슬람도 비교적 잘 수용했다. 그럼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기독교는 어떤가? 이 질문에는 대륙에 기독교 유적이 얼마나 많겠느냐는 회의가 들어 있다.

《대륙의 십자가》 송철규·민경중 지음│메디치 펴냄│752쪽│3만5000원 ⓒ조창완 제공
《대륙의 십자가》 송철규·민경중 지음│메디치 펴냄│752쪽│3만5000원 ⓒ조창완 제공

중국의 기독교 유산 7년 동안 추적

하지만 중국 곳곳에선 다양한 기독교 유적을 만날 수 있다. 대도시는 물론이고, 샹그릴라라 불리는 윈난성 오지나 장사의 도시로 불리는 산시성 핑야오 고성에 가도 가만히 무릎 꿇을 수 있는 조용한 교당이 있다. 물론 베이징 등 대도시에서도 꼼꼼히 보면 다양한 기독교 유산을 만날 수 있다. 이 유적을 7년간 추적한 중국 전문가들이 있다. 최근 《대륙의 십자가》를 펴낸 중국학자 송철규 교수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민경중 사무총장이 그들이다.

송 교수는 중국학 박사를 취득하고, 하얼빈이공대학교와 한중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중국 고전이나 문화에 대한 저술을 해 온 학자다. 민 사무총장도 중국학으로 박사를 취득했고, CBS 베이징 특파원 등 중국과 뉴미디어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중국 전문가다. 두 사람은 어떤 계기로 이 책을 기획 진행하게 됐을까.

“중국과 중국문화를 전공한 신앙인이자, 오랜 동학으로 중국의 기독교 상황에 관심을 가지던 중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돼 집필을 시작했다. ‘중국은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인식이 강하고, 특히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기독교의 조합에 낯선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확인된 것만 해도 중국의 기독교사는 1385년에 이른다. 당나라 때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이 기원전 635년 장안(현 시안)에 도착,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전파하고 대진(大秦·로마)사를 세워 200년 가까이 흥왕했던 역사 속에서 일반인들에게 기독교 전래의 오랜 역사와 수용 과정을 총체적으로 알리고 싶었다.”

책은 당연히 그 기록을 찾는 것에서 시작한다. 바로 시안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찾는 것이다. 서기 781년에 세워진 이 비는 말 그대로 경교가 당시 시안에서 인기를 끈 것을 말한다.

“책에서 언급한 도시들 모두가 답사할 가치가 있지만 특별히 추린다면 당나라 때 처음 그리스도교가 전파돼 150년간 활발하게 펼쳐졌던 역사를 기록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먼저 볼 것을 권한다. 시안 이외에는 많은 인물과 유적을 갖고 있는 상하이, 허드슨 테일러를 기념할 수 있는 전장, 그리고 한국 기독교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선양을 추천한다.”

당태종의 종교 포용정책으로 한때 잘 정착하고, 몽골에서는 상당수 부족의 중심 종교로까지 자리하게 된다.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 등 수많은 선각자들이 소중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선교 과정 전체는 말 그대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님의 행적과 다르지 않았다. 우선 앞서 말한 경교유행비조차 세워진 지 30년 만에 급히 숨기듯 땅에 묻히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의화단운동 시기에는 기독교인이 타깃이 돼 200명의 외국인 선교사와 2만 명의 중국인 신자가 잔인하게 살해됐다. 공산화 이후 진행된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기독교인들은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해안도시보다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내륙지방에서의 지난한 헌신과 희생이 큰 울림을 주었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로 대표되는 내지선교회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전장(鎭江)과 스탐 부부의 희생, 그 가족의 지속적 헌신을 보여주었던 허페이(合肥) 부분의 여운이 깊다.”

중국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독자들은 우선 삼자교회라는 독특한 중국식 교회를 알아야 한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기독교에서 벌어질 수 있는 서구와의 접점을 끊기 위해, 자주적으로 생존하라는 방식의 교회다. 결과적으로 원리에 충실한 교인들은 삼자교회를 거부하고, 가정교회 등의 방식으로 자존을 지키면서 살았다. 민 사무총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탄압과 박해 단계로 향하는 중국의 기독교

“‘삼자교회(등록교회)는 부정적이고 가정교회(비등록교회)는 긍정적이다’는 기존의 관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물과 운동에는 장단점이 존재하듯이 ‘삼자교회’ 내부에서도 치열한 논쟁을 하고 있다. 즉 ‘삼자교회’는 현재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존재하는 기구다. ‘등록교회’는 정부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고, ‘미등록교회’는 압박 속에서도 자생을 이어갈 것이다. 이렇듯 중국의 교회는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지속 성장과 생존을 이어갈 것이다.”

문제는 2018년 2월부터 좀 더 엄격해진 ‘종교사무조례’가 시행되면서 미등록교회는 위축을 넘어, 탄압과 박해 단계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기독교의 발전에는 ‘조선족’으로 명명되는 중국 동포나 1992년 한ㆍ중 수교를 전후로 넘어간 한인 목사나 선교사들의 역할도 적지 않다. 이 부분은 중국 동포들의 중심지인 선양편에서 다루었다. 중국에서 기독교 역사는 한순간도 안심할 수 없는 시간의 연속이다. 그런데도 현 중국 내 교인이 1억 명으로 추산된다. 향후 추세는 어떻게 될까.

“중국인들이 중국 안팎에서 신앙을 접하기 때문에 등록교회와 미등록교회를 불문하고 계속 증가할 것이다. 중국 지도부도 탄압의 방식보다는 관리 쪽으로 태세전환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민족 갈등과 외세 간섭’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종교를 ‘사회의 긍정 에너지’로 수용하기를 희망한다. 이럴 때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할 수 있는 4차 산업혁명은 위기가 될 것이다. 예수는 구유에서 태어나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는 지존의 자리를 몸소 버리고 더불어 사는 겸손과 배려, 화해의 삶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권력화되고 세력화되고 수직화된 신앙을 성토했다.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사회 면면에 녹아드는 신앙이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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