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재벌가 결혼 리포트] ‘끈끈함’ 대신 ‘신중함’ 더해졌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0.07.08 10:00
  • 호수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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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계 혼맥 구축보다 리스크 최소화에 방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가운데서도 한 개인과 집안 모두의 가장 큰 경사인 결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재벌가(家)도 예외가 아니다. 7월4일 현대가 3세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이, 지난 6월21일엔 경동그룹 후계자로 꼽히는 손원락 경동인베스트 부회장이 결혼했다. 

보통 오너 후계자 결혼에 관한 대기업들의 대응은 정해져 있다. “사적인 영역이라 어떤 말도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벌가의 혼사를 단순히 ‘사적인 영역’으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작게는 기업의 대외 신뢰도, 크게는 명운까지 좌우할 수 있는 중요 사안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정 부사장, 손 부회장의 배우자는 각각 대학을 갓 졸업한 교육자 집안 출신 재원, 전직 KBS 아나운서였다. 재벌가 입장에서는 같은 재계나 정계, 법조계, 언론계 등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사돈 집안 후보’ 틀에서 벗어난 선택을 한 셈이다. 

ⓒ일러스트 김세중
ⓒ일러스트 김세중

전형적인 ‘재벌 사돈’ 틀 탈피 

이 같은 경향은 최근 3년 새 부쩍 짙어졌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부사장은 지난해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신부와 유럽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2010년 함께 한화그룹에 입사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당시 한화그룹 차장으로 입사해 후계 수업을 받기 시작한 김 부사장은 신입사원 연수 과정에서 현재의 배우자를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결혼한 두산그룹 4세 박서원 두산매거진 대표, CJ그룹 4세 이선호 CJ제일제당 부장은 모두 전직 아나운서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박 대표와 이 부장이 재혼이라는 점, 지인 소개로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는 점 등도 닮았다. 

최태원 SK 회장의 장녀 최윤정씨는 2017년 IT 벤처기업인과 결혼했다. 같은 해 함영준 오뚜기 회장 장녀 함연지씨는 국내 한 대기업 임원의 아들로 알려진 남자친구와 부부 사이가 됐다. 최씨, 함씨 모두 정략결혼과 무관한 연애결혼으로 화제를 모았다. 

재벌가 자제가 연예인과 결혼한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은지 오래다. 결혼 상대가 유명인이라고 하면 대부분 아나운서다. 일반인과의 연애결혼이 대세를 이뤘고 사전에 집안 간 혼담이 오간 경우라도 과거처럼 재계-재계, 재계-정계, 재계-언론계로 맺어지는 사례는 뜸해졌다.  

그 이유를 분석하기 위해선 재벌 혼맥의 역사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재벌 대다수는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해 왔다. 광복과 6·25 전쟁, 군사정권기 등을 거치며 일제가 남긴 적산 기업을 불하받거나 전후 복구, 정부 경제개발계획 흐름과 발맞추며 사세를 키웠다. 정경유착을 통한 성장이었다. 물론 재벌 1~2세대의 남다른 의지와 혜안, 결단 등도 도약에 큰 동력이 됐다.  

초창기 성장 과정에서 재벌들은 정계와 혼맥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재벌 1세대가 재계-정계로 이어지는 혼사에 관심이 있었다면, 2세대에 들어선 재계-재계, 재계-언론계로 이어지는 혼맥이 도드라졌다. 사회가 발전하며 정치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반면, 자본·언론권력은 대폭 강화됐다는 방증이었다. 

지금 한국은 고도성장기를 한참 지나 성장 정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재벌들은 국내에서 생존을 걱정하는 처지가 아니다. 세계로 뻗어 나가며 내로라하는 글로벌 대기업들과 경쟁하는 곳이 많아졌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고 한 뒤에도 재벌을 위시한 자본권력의 힘은 계속 세졌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1980년대까지는 정부 혹은 정치권력이 기업의 성장이나 수익에 영향을 줄 여지가 많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면서 “1990년대 들어, 특히 외환위기 이후엔 대기업들이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면 미칠까, 재계에 대한 정치권력의 영향력은 미미해졌다”고 진단했다. 이어 “자본권력을 쥔 사람들 입장에서 정치세력과 개인적인 관계(혼맥)를 맺을 필요가 사실상 없어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2세대에 성행하던 재계-재계, 재계-언론계 혼사도 주춤하다. 자본권력이 커진 동시에 그 부(富)를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도 막대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치·경제적 민주화 속 사회적 견제장치, 대중 노출도가 워낙 강해짐에 따라 재벌 1~2세대 때처럼 혼맥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하지 못하게 됐다. 아울러 부의 대물림 못지않게 자본권력 간 결합도 두고두고 대중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 십상이다. 

“안전하고 무난한 혼사가 대세로” 

LG가 4세 구광모 회장은 2009년 식품 중견기업 보락 정기련 회장의 딸 정효정씨와 결혼했다. 구 회장 부부는 미국 유학 시절 처음 만나 사랑을 키운 것으로 전해졌다. 사돈 기업 간 사업적 연관성이 낮은 결혼이었을뿐더러 사세 차이도 엄청나 양가 모두 결혼을 반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도 구 회장 부부는 각자 집안을 설득, 결국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구 회장 같은 결혼 사례는 더 이상 화젯거리가 안 될 만큼 일반화됐다. 3세대 이상의 재벌가 자제들은 대부분 유학파인 데다 급격히 달라진 문화 풍토를 고스란히 체화한 세대다. 집안의 뜻을 그대로 따라 중매결혼하는 대기업 후계자는 이제 드물다. 이런 트렌드는 앞으로 더욱 퍼질 전망이다. 시사저널이 지난 2월 국내 30대 그룹(자산총액 기준)을 전수조사한 결과 오너가 있는 24곳의 후계자 열에 아홉은 미국 대학 출신이었다.  

그렇다고 재벌가 분위기가 자유분방하거나 편안해졌다고만 보기는 힘들다. 대한민국 이너서클 내에서의 ‘끈끈함’이 줄어든 대신 리스크를 최대한 피하려는 ‘신중함’을 더한 모습이다. 한 대기업 전문가는 “최근 재벌가 혼사를 들여다보면 유력한 집안과의 결합이 줄어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안정감은 더 강화된 느낌”이라며 “어차피 결혼 상대도 일반인 중에선 웬만한 재력이나 사회적 지위를 갖춘 집안 출신이고 하나같이 학벌·인성 등에서도 빠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끼리의 지나친 경쟁이나 상부상조는 옛말이고 각자 확고한 사업 영역을 갖췄기에 혼사를 리스크 관리나 사업 확장 도구로 쓸 일이 없다. 오히려 사돈 기업으로 인해 위기나 오해에 휘말릴 여지가 생길 수 있다”면서 “정략결혼이든 연애결혼이든 재벌의 파혼 사례 역시 미디어 등을 통해 숱하게 회자된 터라 이제 안전하고 무난한 혼사가 대세로 자리 잡은 듯하다”고 했다. 

2017년 6월16일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장녀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와 서승범 유봉 대표이사의 결혼식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7년 6월16일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장녀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와 서승범 유봉 대표이사의 결혼식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재벌가는 아나운서를 선호한다? 

‘현대’ ‘CJ’ ‘두산’ ‘KG’ ‘경동’. 전직 아나운서들이 며느리로 들어가 있는 재벌가다. 특히 최근 이선호 CJ제일제당 부장(이다희 전 SKY TV 아나운서), 박서원 두산매거진 대표(조수애 전 JTBC 아나운서), 곽정현 KG이니시스 이사(배수빈 전 강릉 MBC 아나운서), 손원락 경동인베스트 부회장(강서은 전 KBS 아나운서) 등이 잇따라 아나운서 출신과 결혼하며 재벌가의 아나운서 신붓감 선호가 도드라졌다. 오너 일가는 아니지만, 소진세 교촌에프앤비 회장은 정지원 KBS 아나운서를,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최윤영 전 MBC 아나운서를, 최용묵 전 현대엘리베이터 사장은 최원정 KBS 아나운서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재벌가 자제-아나운서 커플 중 가장 큰 화제를 모았던 사례는 정대선 현대비에스앤씨 사장과 노현정 전 KBS 아나운서였다. 방송활동 당시 전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노 전 아나운서는 2006년 정 사장과 결혼 후 곧바로 KBS에 사표를 썼다. 그 후 온전히 현대가 며느리로서의 삶에 집중했다. 

아나운서는 유명인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평범한 집안 출신 인재와의 결혼’이라는 재벌가 혼인 신(新)풍속도에 가장 부합한다. 지성과 미모를 갖췄고, 예의와 공손함도 몸에 배어 있다. 실제로 일부 아나운서들에게는 재벌가와의 소개팅 제의가 종종 들어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지원 KBS 아나운서는 개인 유튜브 채널을 통해 “(교양 프로그램인) 《도전 골든벨》을 진행했을 때 (재계의 소개팅 제의) 연락을 제일 많이 받았다”고 회상했다. 

한편 재벌가에 시집간 아나운서 중 대다수가 직장생활을 그만두는 것을 두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도 있다. 임현주 MBC 아나운서는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재벌가 자제와 결혼한 아나운서의 사례를 보면 일을 그만두고 육아와 내조에 전념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나운서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며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니 비난할 바는 아니지만 일련의 과정들이 대중에겐 그렇게(재벌과 결혼하기 위해 아나운서가 됐다고) 비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지적했다. 

재벌가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 역시 다양해지면서 아나운서들의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고 김지원 아나운서는 전했다. 김 아나운서는 “결혼을 앞둔 아나운서들이 재벌가를 선호한다고 결코 일반화할 수 없다”며 “과거와 달리 여성도 직업을 가지고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하는데, 그런(재벌) 집안에 들어가면 사실상 쉽지 않다. 실제로 요즘 여성 아나운서 배우자의 직업군을 보면 매우 다양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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