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계 폭력] ‘호통’만 친 국회가 ‘체육계 괴물’ 키웠다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20.07.14 09:00
  • 호수 160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8년 김은희, 2019년 심석희, 2020년 최숙현까지 피해자 줄 이어
“국회, ‘근본 대책’ 아닌 ‘반짝 대책’만 내놔”

“이참에 체육계의 성폭력 비위 행태를 철저히 전수조사해 썩은 뿌리를 모조리 뽑아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이재정 더불어민주당 대변인)

“한국당은 문화·예술·체육계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성폭행 실상을 조사하고 관련 대책 마련에 나서겠다.”(김정재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의 전신) 원내대변인)

2019년 1월9일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가 조재범 전 대표팀 코치로부터 상습 폭행 및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자, 당시 여야 정치권은 ‘부랴부랴’ 대책 마련을 공언했다. 전수 피해조사를 실시하고 관련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게 골자였다. 그러나 500여 일 뒤,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유망주였던 최숙현 선수가 숨을 거뒀다. 최 선수의 극단적 선택의 배경으로 또다시 상습적 폭행이 지목된 상황. 국회가 다시 ‘대책 마련’을 공언하고 나섰지만, 체육계 관계자들은 불신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쇄신하겠다던 정치권의 약속이 지켜진 선례가 없기 때문이다.

ⓒ뉴시스
ⓒ뉴시스

2년 전 시작된 ‘스포츠 미투’…‘기회’는 있었다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지난 6월26일, 트라이애슬론 유망주였던 고(故) 최숙현 선수는 이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 선수의 극단적 선택 이후, 체육계에 상습적 폭행과 가혹행위가 만연했다는 증언이 줄을 잇고 있다. 7월6일 최 선수의 동료 선수라고 소개한 한 피해자는 국회 기자회견을 통해 “감독은 숙현이와 선수들에게 상습적인 폭행과 폭언을 일삼았으며, 주장 선수도 숙현이와 저희를 집단 따돌림 시키고 폭행과 폭언을 일삼았다”고 증언했다. 이어 “지금이라도 가해자들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처벌이 제대로 이뤄져 모든 운동선수들의 인권이 보장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스포츠계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종목을 불문하고 스포츠계 전반에 폭력 및 폭언 문화가 만연해 있다는 얘기다. 실제 최 선수의 죽음 이전에도 스포츠계 악습에 대한 ‘경고등’은 이미 들어와 있었다. 전 테니스 선수 김은희씨는 2016년 초등학교 시절 자신을 성폭행한 코치를 고소했고, 이 사실을 2018년 방송에 나와 밝혔다. 지난해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가 상습 성폭행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때마다 국회는 체육계 비리를 근절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체육계 개혁 이슈는 늘 여야 정쟁에 밀려 함몰되고, 밀려나다, 잊히는 걸 반복했다.

2019년 1월10일 당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당 차원에서 한 선수의 성폭행 문제를 넘어 대한체육회의 문제까지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대책을 세워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민주당은 체육계 전수 피해조사 등을 약속하며 빠른 대책 마련을 수립하겠다고 공언했다. 한국당은 한발 더 나아가 ‘체육계 미투 1호’ 인사인 김은희씨를 정치권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염동열 인재영입위원장은 “당내 인권센터를 설립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체육계 인권실태조사는 1년여 동안 이뤄지지 않았다. 통합당 총선 영입인재 1호였던 김은희씨는 통합당 지역구 공천에서 배제됐고, 결국 국회에 입성하지 못했다. 한국당이 약속한 당내 인권센터 설립 계획은 통합당에서 아직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

관련 법안이 올라가는 과정도 지지부진했다. 지난해 1월10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소속 여야 의원들은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더 이상 체육계의 폭행과 성추행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며 ‘운동선수 보호법’(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 발의 계획을 알렸다. ‘스포츠 윤리센터’를 설립해 인권 침해 사건을 조사하고 고발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운동선수 보호법’을 상정할 예정이던 지난해 3월27일 국회 문체위 전체회의는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을 둘러싼 대립으로 끝내 파행됐다. 이후 20대 국회에서 여야 충돌이 격화되며 해당 법안은 지난해 11월에야 법사위를 통과했고, 국회 본회의 문턱을 올해 1월에야 넘어설 수 있었다. “공포 후 6개월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한다”는 부칙 조항이 붙어 있어 오는 8월4일이 법안 시행일이다. 그사이 최숙현 선수가 숨을 거둔 것이다.

여야는 모두 ‘달라진 국회’를 약속하고 있다. 이번만큼은 체육계의 잘못된 관행을 바꿔낼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7월6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최숙현 사건을 계기로 스포츠계 폭력 비리를 완전히 손봐야 한다”며 “체육계 인권 침해 실태에 대한 정부 전수조사를 실시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고 말했다.

체육계 미투 1호 고발자인 김은희 전 테니스 선수(왼쪽 사진)와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 ⓒ연합뉴스
체육계 미투 1호 고발자인 김은희 전 테니스 선수(왼쪽 사진)와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 ⓒ연합뉴스

“각 종목 단체에 조사 맡겨…회유와 은폐 만연”

김 원내대표는 “8월 출범하는 스포츠윤리센터가 체육계 인권 경찰 역할을 다하도록 점검하겠다”며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선수 보호법 허점의 한계를 보완하겠다. 피해자를 최우선적으로 구제하는 선수 인권 보호와 가해자 처벌 강화를 추진해 제2의 최숙현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치권에 대한 기대는 차갑게 식은 상태다. 매년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대책 마련’이란 구호가 현실화된 사례가 없어서다. 빙상계 적폐를 고발했던 여준형 젊은빙상인연대 대표는 “(국회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순간만 반짝 관심을 갖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는지, 제대로 해결됐는지 확인을 하지 않는다”며 “(의원들이) 현안의 핵심조차 모르는 것이 문제다. 심지어 엘리트 체육인이라는 의원도 질타만 할 뿐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공부가 제대로 돼 있지 않은 모습”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우선 각 종목 단체에서 조사를 하다 보니 회유와 은폐가 쉽다. 또 너무 더디게 진행되다 보니 2차 피해가 생기기도 하는 상황”이라며 “이 부분부터 빨리 개선하고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체육계 폭력] 연관기사

‘호통’만 친 국회가 ‘체육계 괴물’ 키웠다  

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383

“피해자가 안심하고 신고할 수 있는 환경 부족”  

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384

‘성적 지상주의’ 패러다임 바꿀 때 됐다   

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292

스포츠윤리센터, 폭력 근절 효과 있을까  

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485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