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감옥’에 갇힌 사람들
  • 정락인 객원기자 (jongseop1@naver.com)
  • 승인 2020.07.22 08:00
  • 호수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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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강력 범죄자 신상 공개 시스템 등장 …사법부 불신이 낳은 현상

‘법’은 정의로운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법원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의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엔 저울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칼이나 법전을 들고 있다. 저울처럼 공정하게, 칼처럼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겠다는 뜻이다. 눈이 가려진 건 권력과 편견에서 벗어나 공평하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우리 사법부의 신뢰는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재판 거래 의혹에 봐주기 등 온갖 오명을 쓰고 있다. 돈을 가진 자에게 관대한 ‘무전유죄, 유전무죄’도 여전하다.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은 이미 기울대로 기울었다는 비판도 넘쳐난다. 심지어 사법 피해자들이 단체까지 결성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최근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W2V) 운영자 손정우씨(24)를 미국에 송환하지 않겠다고 법원이 결정하자 국민 분노가 폭발했다. 이와 관련한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청원 게시 당일 10시간 만에 20만 명이 동의했고, 8일 만에 50만 명을 넘어섰다.

손씨는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이른바 ‘다크웹’에서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하고 영유아 성착취물 22만 건을 유통했다. 피해자 중에는 생후 6개월 된 아기도 있었다. 이를 통해 44억원의 불법 부당이익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환수한 것은 고작 4억원 정도에 불과하다.

손정우는 물론 판사들 신상도 공개돼

2018년 3월 구속기소된 손씨에 대해 법원은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2심은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손씨는 범죄수익금으로 변호사 7명을 선임해 솜방망이 처벌을 이끌어냈다. 텔레그램방에 미성년자를 비롯한 여성들의 성착취물을 공유한 이른바 ‘n번방’ 관련자들의 신상이 줄줄이 공개되고 무거운 처벌이 예상되는 것과는 딴판이다.

지난 7월6일 손정우의 미국 송환 불허 방침이 나온 후 포털사이트에는 ‘디지털 교도소’가 실시간 검색어로 올라왔다. 이후 3일 동안 검색어 상위를 차지하는 등 뜨거운 국민적 관심을 받았다. 이곳은 악성 범죄자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사이트다. 아동학대범, 성범죄자, 살인자 등이 대상이다.

현재 100명이 넘는 개인 신상이 올라와 있다. 여기에 손정우도 있다. 운영자는 그를 ‘성범죄자-디지털’ 항목에 분류해 놓고 사진은 물론 생년월일, 출신학교 등 개인정보를 공개했다.

이뿐만 아니라 손씨의 미국 송환 불허 판결을 내린 강영수·정문경·이재판 판사의 사진과 개인정보도 함께 게시됐다. 손씨와 판사들이 함께 디지털 감옥에 갇힌 셈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철인경기 국가대표였던 고 최숙현 선수에게 위해를 가한 이들의 신상도 털어서 게시했다.

현직 경찰서 지구대장과 그의 아들의 실명과 사진도 공개돼 있다. 운영자는 이들이 지난 2004년에 발생한 단역배우 자매 집단성폭행 자살 사건 관련자들이라고 적었다. 해당 경찰관은 당시 수사를 맡았던 담당 경찰관으로 피해자에게 강제로 고소를 취하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의 아들은 피해자 어머니 후원인을 협박해 후원을 중단하게 만들었다는 게 이유다. 물론 일방적인 운영자의 주장일 뿐이다. 단역배우 사건의 가해자라며 이 중 한 명의 사진과 실명, 주소도 공개돼 있다.

이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은 뜨겁다. 손정우와 판사들 관련 글에는 1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대부분은 손정우와 판사들을 성토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재판 결과에 낙담하는 이들에게 대리 만족을 주고 있다.

사이트 운영자는 운영 목적에 대해 “대한민국의 악성범죄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에 한계를 느끼고, 이들의 신상정보를 직접 공개하여 사회적인 심판을 받게 하고, 범죄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처벌, 즉 신상 공개를 통해 피해자들을 위로하려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사이트는 동유럽권 국가 벙커에 설치된 ‘방탄 서버’에서 강력히 암호화돼 있어 대한민국의 사이버 명예훼손, 모욕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경찰은 “개인이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위법 소지가 있다”며 디지털 교도소 운영자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다. 경찰에 따르면 디지털 교도소 운영자는 지난 3월부터 다수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활용해 성범죄자 신상정보를 공개했다. 이후 제재가 가해지자 지난달 지금의 웹사이트를 만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온라인 신상 공개 방법 총망라해 시스템 구축

‘디지털 교도소’의 등장은 사법 불신이 낳은 사회현상 중 하나다. 물론 이전에도 강력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분노한 네티즌들이 범죄자의 신상을 털어 공개해 왔다. 고유정 사건도 공식적으로 신상이 공개되기 전 이미 이름과 사진이 온라인을 통해 확산됐다.

네티즌들의 ‘신상 털기’ 방법도 진화를 거듭해 왔다. 단순한 검색에 그치지 않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유추해 가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미니홈피나 블로그 등에 글을 쓴 후 남겨진 IP 주소를 통해 추적했다. 확보된 IP를 기반으로 검색해 동일한 IP로 작성된 글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IP 주소 논란’을 겪은 뒤 뒷자리가 비공개로 처리되자 좀 더 새로운 기법들이 나왔다. 미니홈피와 블로그, SNS 계정 등을 찾아내 정보를 얻거나 구글 검색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심지어 신상 털기 전용 검색엔진이 등장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검색을 원하는 사람이 인터넷에 쓴 글, 휴대전화 번호, 사진 등을 모두 찾아낼 수 있는 무서운 기능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사생활 침해 등의 문제가 야기되면서 문을 닫은 상태다. 누구든지 네티즌 수사대에 한번 걸리면 ‘개인 신상’이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게 현실이다.

‘디지털 교도소’는 지금까지의 신상 공개 방법이 총망라돼 시스템으로 구축된 사례다. 해당 범죄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계속 업데이트하는 것도 이전과는 다르다. 한번 게시되면 운영자가 내릴 때까지는 계속 여론재판을 받아야 한다. 운영자는 그 기간을 30년으로 정하고 있다.

온라인 신상 공개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린다. 사법부의 불신이 계속되는 한 필요하다며 공감하는 이들도 많지만 사적인 신상 공개는 적잖은 문제도 야기해 왔다. 범죄와 전혀 관련 없는 동명이인이 범죄자로 지목돼 공개되는 일도 있었다. 범죄자와 무관한 가족이나 친구들의 개인정보가 노출돼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n번방 사건이 불거진 후 텔레그램에는 n번방 관련자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주홍글씨’가 등장했다. 이들은 자경단을 자처하며 정의로운 척했으나 경찰 수사를 통해 원래 성착취 공유방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단속을 해도 사법 불신이 계속되는 한 제2, 제3의 디지털 교도소 출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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