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성폭력 내부 고발 후 완벽한 투명인간이 됐다”
  • 박성의·구민주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20.07.17 10:00
  • 호수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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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문화관광연구원 성추행 피해 주장 정인영씨
“상사 고발 후 단톡방·회의서 배제…'독한 X' 소리 들으며 버텼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문화관광연구원(문광연·KCTI)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던 여성 연구원 2명이 지난 7월1일 최근 정규직 남성 연구원 A씨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고소장에 따르면, A씨는 2017년 9월8일 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 고소인 피해자 정인영씨의 손을 강제로 잡으려 하고 본인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또 같은 달 22일에는 A씨가 출장지에서 또 다른 고소인 피해자 김 아무개씨에게 입맞춤을 시도하고, 술에 취한 채 김씨의 숙소 방문을 두드리며 들어오려 하는 등 추행했다고 적시돼 있다(자세한 내용은 앞선 기사 《“억지로 손잡고, 입맞춤 시도”…문화관광연구원 ‘성추행’ 의혹》 참고).

고소 전 정씨와 김씨는 성추행 사건을 문광연에 먼저 알렸지만, 최소한의 분리 조치 없이 A씨와 계속 같은 공간에서 근무해야 했다. 이들은 1~2개월 단위로 계약을 연장하는 이른바 ‘쪼개기 계약’을 문광연과 이어가는 위촉연구원이었기 때문에 당시 더 적극적으로 사태 해결을 요구하지 못했다고도 주장한다. 오히려 상사를 내부고발했다는 이유로 정씨는 이후 조직에서 더 큰 고통을 받았다고 말한다.

ⓒ시사저널 박정훈
ⓒ시사저널 박정훈

“피해 고발 후에도 가해자와 함께 업무”

한 달 단위의 계약, 상사 연구원에 종속돼 일하는 업무 구조 속에서 철저히 ‘을’이었던 정인영씨는 내부고발 후 업계에서 ‘투명인간’이 됐다. 정씨는 7월15일 시사저널과 진행한 실명 인터뷰에서 “나의 고용은 가해자 A씨에 의해 매달 연장 여부가 결정됐다. A씨의 가해 사실을 조직에 알린 후 팀 회의와 카카오톡 단체채팅방 등에서 배제됐고, 납득되지 않는 일들로 숱한 괴롭힘을 받았다”고 밝혔다.

정씨는 2017년 9월 울산 출장 당시 A씨로부터 겪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문광연 상사이자 성고충위원회 위원이던 B실장에게 곧장 알렸다. 그러나 정씨에 따르면, B실장을 비롯해 조직에선 이후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물론, 가해자와의 기본적인 분리 조치조차 취하지 않았다. 정씨는 이듬해 3월까지 A씨와 매일 얼굴을 보며 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오히려 노골적인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회의에서 날 배제하고, 태도 등의 문제로 내가 울 때까지 야단치기도 했다.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경우 가해자의 상사 역시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A씨의 상사인 B실장 역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점점 조직 전체에서 투명인간, 왕따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에게 이렇게 해도 버틴다며 ‘독한 X’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15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시사저널에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성폭력 갑질 관련 제보자 인터뷰 ⓒ시사저널 박정훈
15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시사저널에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성폭력 갑질 관련 제보자 인터뷰 ⓒ시사저널 박정훈

“단톡방에 문제 제기해도 홍보글에 묻혀”

이렇게 버티던 정씨는 결국 지난 1월 돌연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발단은 2019년 11월 당시 문광연이 문체부·행정안전부 등과 ‘지역의 힘’이라는 한 지역문화행사를 진행 과정에서 벌어졌다. 행사를 준비하던 중 정씨를 포함한 관계자 40여 명이 극심한 안구 통증을 호소하는 일이 발생했다. 병원은 이들이 ‘원인 불명 유해 물질’에 노출된 탓에 각막염과 결막염이 생겼다고 진단했다. 정씨의 주장에 따르면 문광연 측은 해당 사건의 부상자를 문체부에 8명으로 축소 보고했다. 즉각적인 보상 및 사고 원인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정씨는 이후 피해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와 해명을 주문하며 다시 한번 문광연과 충돌했다. 그리고 두 달 뒤 정씨는 계약 해지를 통보받은 것이다.

해당 사업에 참여하는 동안에도 정씨는 성폭력 고발 이후 계속돼 온 ‘2차 피해’를 더욱 크게 체감했다고 말한다. 우선 해당 사업을 주도하는 인물 또한 가해자 A씨였으며, 그의 네트워크가 어딜 가든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이 업계에서 내가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 돼 있었다. 현장에서 이유 없이 질타를 받고 소외되는 일이 많았다. 500여 명이 포함돼 있는 사업 관련 단체채팅방에 한동안 혼자 초대받지 못했고, 그 때문에 사전에 장소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거나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연구원 차량에 더 이상 탈 자리가 없다며 알아서 혼자 현장에 찾아오라고 한 적도 있었다. 모두 A씨를 깍듯이 대하는 그의 지인들이었다.”

2017년 성폭력 사건부터 올해 초 해고 문제가 발생하기까지, 업계에서 정씨의 지속적인 호소에 기꺼이 함께 나서준 이는 찾기 힘들었다. 정씨는 “‘지역의 힘’ 사업 때부터 유지되고 있는 500여 명의 단체채팅방엔 문화예술계 교수들과 활동가들, 각 재단과 기관 담당자와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 등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며 “내가 당했던 피해와, 현장에서 비슷한 피해를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함께 얘기해 보자는 제안을 채팅방에 몇 차례 했지만 그때마다 철저한 무시를 맛봤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글을 올리고 나면 이내 ‘○○재단에서 XX 사업을 진행합니다. 많은 홍보 부탁드려요’와 같은 홍보글이 올라와 내 얘기를 묻어버렸다”고 말했다.

향후 끈질긴 싸움을 통해 자신의 부당 해고를 바로잡고 문광연에 복귀하기를 바라고 있다. 나아가 여전히 조직에 몸 담고 있는 A씨와 문제 처리 과정에서 직무유기를 한 조직에 책임 또한 물을 예정이다. “‘현장에 너같이 피해 본 사람들 한둘이 아니다’며 그냥 넘어가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갑’인 연구원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일 자체를 할 수 없고, 늘 조직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 자체를 바꿀 기회”라며 “연구원 스스로 문제를 인정하고 철저히 깨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정씨와 김씨의 이 같은 피해 주장에 대해 A씨와 문광연 측은 “사실과 다르다”며 해당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그 가운데 최근 문체부가 문광연에 조사반을 파견해 감독에 착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반론보도]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성추행 사건」 관련

본 주간지는 지난 2020년 7월 17일자 「[단독] “성폭력 내부 고발 후 완벽한 투명인간이 됐다”」 및 「“억지로 손잡고, 입맞춤 시도”…문화관광연구원 ‘성추행’ 의혹」 제목의 기사와 관련해 당시 성고충위원이었던 B실장은 “김씨의 피해사실을 공론화하지 않았던 것은 김씨의 명시적인 의사에 따른 것이었고, 김씨에게 가해자 징계와 피해자 구제절차를 반복적으로 안내했다. 또한 김씨의 피해사실을 알린 정씨는 당시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린 바 없고, 정씨가 내부고발자라는 이유로 직무상 어떠한 불이익을 준 사실이 없다”라는 입장을 전해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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