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때려치우고 싶다면 ‘번아웃 증후군’?
  • 노진섭 의학전문기자 (no@sisajournal.com)
  • 승인 2020.08.01 10:00
  • 호수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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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적 직장 스트레스에서 오는 증상…마음과 데이트하는 ‘하루 10분 산책’ 필요

대중에게 웃음을 주는 유명 개그맨 A씨가 병원을 찾은 적이 있다. 그는 의사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이 답답하고 정신을 잃어 죽을 것 같다고 호소하면서 진료실 책상에 머리를 박고 괴로워했다. A씨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의사는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으로 진단했다.

글자 그대로 모두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것 같다고 해서 번아웃 증후군 또는 소진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이 증상은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다. 직장인에게 생기는 일종의 직업적인 증상이다.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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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증후군은 1974년 미국 심리학자 허버트 프로이덴버거가 ‘상담가들의 소진’이라는 논문에서 약물 중독자를 상담하는 전문가가 느끼는 무기력증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다. 번아웃 증후군이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된 것은 그 후 40년이 지났을 때다. 2015년 독일의 저먼윙스 A380 여객기가 알프스 자락에 추락해 탑승객 150명 전원이 사망했다. 추락 원인을 조사한 결과 기장이 화장실에 간 사이 부기장이 고의로 비행기를 추락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의료진단서에는 “6년 전 정신과 치료를 받은 부기장은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앓고 있었다. 번아웃 증후군이 있었던 것 같다”고 기록돼 있다. 이 사건은 번아웃 증후군이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그렇지만 번아웃 증후군이 독립적인 질병인지 아니면 우울증·불안장애·적응장애 등 다른 정신질환 증상의 일종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유럽은 번아웃 증후군을 질병으로 분류하는 반면, 미국은 질병이 아닌 것으로 본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해 이런 논란을 종합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만성적 직장 스트레스에서 오는 증후군’이라고 정의했다. 의학적으로 질병은 아니지만 제대로 알고 관리해야 하는 직업 관련 증상 중 하나라고 인정한 것이다.

국내에서 번아웃 증후군은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시장조사업체 마크로밀엠브레인이 2015년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10명 중 4명이 스스로 번아웃 증후군 상태라고 답했다. 지난해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직장인 492명을 조사한 결과는 95%가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진료실에서 번아웃 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하루에 한 명 정도는 보는 것 같다. 번아웃 증후군에 대한 통계는 없지만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번아웃 증후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지 않고 개인적으로도 자신이 번아웃 증후군인지 모르거나 단순한 스트레스로 여기거나 조금 심하다 싶으면 우울증으로 치부한다. 번아웃 증후군은 우울증과 다르다. 우울증은 우울한 감정이 과도하게 작동하지만 감정은 살아 있다. 그러나 번아웃 증후군은 감정이 사라진 무감동 상태다. 또 우울증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병이라면 번아웃 증후군은 주로 직장인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의욕적으로 열심히 일해 온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이어서 번아웃 증후군을 ‘열심히 살았다는 훈장’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상사와 구체적인 걱정거리를 논의하면 타협점이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freepik
상사와 구체적인 걱정거리를 논의하면 타협점이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freepik

통제하지 못할 정도의 업무량이 문제

감기나 독감을 방치하면 폐렴으로 진행하는데 번아웃 증후군도 그렇다. 방치할 경우 일이나 삶에 대한 의욕이 사라지는 정도를 넘어 우울증, 불면증, 불안, 공포, 공황장애, 심장병, 고혈압, 당뇨 등 건강 문제로 발전한다.

번아웃 증후군은 왜 생기는 것일까. 미국 최고 의료기관 중 하나인 메이요클리닉은 번아웃 증후군이 잘 생기는 사람을 6가지로 분류했다. 즉 ‘직장생활과 사생활의 균형이 깨진 사람, 업무량이 많아 야근이나 추가 근무가 필요한 사람, 모든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 하는 사람, 의료진처럼 다른 사람을 돕는 직업을 가진 사람, 업무를 거의 또는 전혀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 일이 단조로운 사람’이다.

평소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고민거리가 전혀 없는 게 아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고민거리가 있어도 스트레스를 덜 받을 뿐이다. 그런데 마음이 지치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을 보게 된다. 긍정적인 사람도 번아웃 증후군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직장 문제도 원인이 된다. 예컨대 업무에 대한 자신의 권한이 불분명할 때, 상사가 자신의 성과를 과소평가할 때, 직장이나 사생활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 번아웃 증후군에 빠질 수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산업안전보호법은 기업이 ‘보건진단’을 받도록 권고하고 있다. 보건진단은 기업이 직장 내 스트레스 부담을 파악하는 행위를 말한다.

의욕 저하-회피-무감동으로 이어지는 증상

윤진하 세브란스병원 예방의학과 교수는 “일이 많거나 업무가 다양한 것 모두 번아웃 증후군의 원인이다. 일이 많으면 자기조절능력을 잃게 된다. 예를 들어 일주일 만에 마쳐야 할 업무가 주어지면 개인이 알아서 계획을 짠다. 그러나 매시간 또는 매일 일이 쏟아지면 자신이 일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자신은 일하는 기계라는 생각에 빠진다. 또 팀워크를 중시하다 보면 개인은 여러 업무를 동시에 하는 멀티플레이어가 되므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된다”고 설명했다.

번아웃 증후군의 3가지 초기 증상은 의욕·성취감·공감력 저하다. 일하고 싶지 않으며 일을 억지로 해도 동기부여가 잘 생기지 않는다. 노력해 어떤 목표를 달성해도 성취감을 잘 느끼지 못한다. 공감 능력이 떨어져 주변 사람을 까칠하게 대하면서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공감은 남을 위로하고 남에게 위로받는 능력이다. 내가 지쳤을 때 상대방에게 따뜻한 감성 에너지를 받아 충전해야 하는데, 주는 것은 고사하고 받는 것도 안 되는 마음 상태가 번아웃 중후군이다.

심리적인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번아웃 증후군의 합병증으로 복부 비만이 생긴다. 우리가 허기를 느끼는 원인의 절반은 정서적 허기 때문이다. 동료들과 술자리와 식사를 해서 배가 부른데도 귀갓길에 홀로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을 먹는 것도 외로움 또는 정서적 허기 때문이다. 배가 불러도 마음이 허전하면 그만큼 폭식한다.

2단계 증상은 시쳇말로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다. 이를 ‘심리적 회피 반응’이라고 한다. 평소 긍정적인 사람도 부정적인 생각이 강해져 스트레스의 원인에서 멀어지려는 심리다. 심리적 회피 반응이 단기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별 소용이 없다. 윤대현 교수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과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동전의 앞뒤처럼 한 객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연한 여자는 남자를 멀리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그 기간이 길어지면 이성으로부터 받는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장기간의 회피는 결국 행복과의 결렬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3단계 증상은 현실 회피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기는 ‘무감동’이다. 세상의 정보와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감성 예민도를 0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에 따뜻한 위로와 작은 행복도 느끼기 어렵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번아웃 증후군은 암보다 아찔한 문제다.

번아웃 증후군 예방을 위해 직장에서 일할 때 틈틈이 휴식 시간을 가져야 한다. ⓒ시사저널 최준필
번아웃 증후군 예방을 위해 직장에서 일할 때 틈틈이 휴식 시간을 가져야 한다. ⓒ시사저널 최준필

치료와 예방법은 ‘포기’와 ‘마음 충전’

로펌을 운영하는 한 60대 변호사는 본래 온화한 성격이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후배 변호사들을 거칠게 대하면서 로펌 운영이 힘들어졌고 그만큼 수입도 줄어들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의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사는 그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었다. 그는 의사가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뚱딴지같이 취미를 물어보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는 고민 끝에 오래전부터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의사는 일을 잠시 잊고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라고 처방했다. 윤대현 교수는 “몇 달 후 그 변호사를 다시 만났더니 인상이 훨씬 밝아졌다. 후배 변호사에게 까칠하게 대하던 태도도 없어졌고 로펌 수입도 늘었다고 했다. 우리의 삶은 기대치를 높일 때 향상되지만 행복은 기대치를 낮춰야 찾아온다”고 말했다.

20년간 한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 온 50대 남성은 일에 의욕이 없어지고 성과를 내도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았다. 직장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서울을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몇 년이라도 지내고 싶었다. 이러다 우울증에 빠지는 게 아닌가 싶어 병원을 찾아 전문의의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의사는 중요한 결정을 뒤로 미루고 우선 ‘마음 충전’부터 할 것을 권했다. 사실 그는 병원을 나온 후 회사에 사표를 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의사의 처방에 따라 사표 제출을 보류하고 마음을 충전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후 그는 다시 활력 넘치는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번아웃 증후군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포기’와 ‘마음 충전’이다. 삶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려놓음’이다. 심리학 용어로는 ‘수용’이다. 마음 충전이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다스리는 것이다.

실천법으로는 산책만 한 것이 없다. 윤대현 교수는 “하루에 10분, 일주일에 1시간, 분기별로는 하루만이라도 마음과 데이트할 것을 권한다. 마음과 데이트하는 방법의 하나로 산책을 추천한다. 하루 10분 산책은 제주도에서 1년 사는 것보다 효과가 좋다. 번아웃 증후군의 단기 처방으로 약물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산책은 약만큼 효과적이고 장기적인 효과를 낸다”고 설명했다.

산책할 때 일에 대한 생각을 접고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발걸음이나 바람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시간은 무의미한 게 아니라 오히려 창의력을 키우는 기회가 된다. 윤대현 교수는 “목표를 향한 집중과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은 창의력과는 거리가 멀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뇌의 디폴트 신경망(기본 신경망)이 작동할 때 잘 떠오른다. 디폴트 신경망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멍 때릴 때 작동한다. 이때 뇌에서는 내재된 정보와 지식을 처리하는 과정이 일어난다. 물끄러미 창밖 경치를 보다가 기차에서 내렸을 때 자주 오던 곳인데도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는데 그것이 디폴트 신경망이 활성화된 현상이다. 디폴트 신경망이 잘 활성화되면 마치 내가 다른 장소, 다른 시간, 심지어 다른 사람의 뇌 안에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것을 ‘초월성 경험(transcendence)’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일과 휴식을 분리하는 태도 가져야

번아웃 증후군을 호소하는 사람은 일을 그만두고 조용한 곳에서 1년 정도 푹 쉬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렵다. 물론 용기를 내서 실천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머리가 더 복잡해지고 직장을 그만둔 스트레스에 더 시달린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직장 내의 문제라면 상사와 구체적으로 논의해 타협점이나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다.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니라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 문제다. 따라서 직장에서 일할 때 틈틈이 휴식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일손을 잠시 놓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이다.

일은 정해진 업무 시간 내에 마치도록 하고 퇴근 후에는 일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는 것이 좋다. 퇴근 후에는 오롯이 자신의 생활을 즐겨야 한다. 운동, 요가, 명상은 일에 대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는 방법이면서 스트레스를 제거하는 수단이다.

버킷리스트를 적거나 여행하는 것도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버킷리스트를 적다 보면 자신이 이런 것도 하고 싶어 했는지 깨닫고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여행을 갈 때는 먼 곳보다는 조용한 곳을 찾는 게 유리하다. 긴 여행 시간과 이국적인 환경은 오히려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번아웃 증후군에서 벗어나는 방법

심호흡 3번: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회의 시작 전,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에 호흡의 흐름을 느끼면서 깊은숨을 3번 쉰다.

음미하는 식사: 조용한 곳에서 음식의 색깔, 향 그리고 밥알의 움직임까지 느끼며 천천히 먹는 것도 자신의 마음에 집중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루 10분 산책: 여유롭게 몸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산책하면 긴장감이 풀어지고 마음을 보는 여유가 생긴다.

일주일에 한 번 수다: 이따금 친구를 만나 수다 떠는 것은 공감을 의미한다. 이른바 ‘공감 수다’만큼 마음의 위로가 되는 것도 없다.

슬픈 영화 감상: 즐겁고 재미있는 내용으로 마음을 조정하는 것을 기분전환이라고 하는데 기분전환만 하다 보면 슬픈 콘텐츠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속 능력이 줄어든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슬픈 영화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좋다.

시 3편: 사람의 마음은 논리보다 은유에 움직인다. 일주일에 시 3편씩 읽어 은유에 친숙해지면 마음을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당일치기 여행: 기차 창문을 멍하니 보면 명상 효과가 일어나고 내 마음을 바라보는 힘이 자란다. 단,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나서야 한다.

도움받기: 상사와 구체적인 걱정거리를 논의하면 타협점이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목표를 세워 당장 해야 할 것과 뒤로 미룰 것을 결정한다. 또 동료나 친구의 조력이나 협업이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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